홍경화 작가 "이제 그만 애쓰자, 적당히 착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 [인터뷰]
[파이낸셜뉴스] "착한 딸, 좋은 동료,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 무의식적인 압력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친절이 미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갉아먹는 피로가 된다. 거절하지 못해 웃고,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참으며,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뒤로 미루는 사람들. 홍경화 작가는 이들을 '적당히 착한 사람들의 고통'이라는 제목 아래 불러 세웠다.
서울대에서 사회심리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캐나다 퀸즈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행복과 삶의 의미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자로서 그의 오랜 관심은 '자아 정체성'과 '자아 연속성'이다.
홍 작가는 6일 "자아는 나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의식이고, 정체성은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아가 '나는 누구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주관적 경험이라면, 정체성은 가치관과 취미, 역할처럼 자신을 설명하는 구체적 특징이다. 결국 자아 정체성이 확립돼야 자신만의 존재를 지키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홍 작가가 특히 깊이 연구해 온 주제는 '자아 연속성'이다. 삶은 끊임없이 변한다.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고, 누군가는 부모가 되며, 외모와 취향, 말투와 사회적 역할도 달라진다.
그는 "사람이 가장 취약한 것 중 하나가 변화"라고 말했다. 변화가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낯설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이 이해해 온 인생의 서사가 갑자기 끊기는 듯한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단절을 느끼면 자신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심리적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자아 연속성을 잘 유지하는 사람은 변화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살고 있고 서사를 만들어간다"고 해석한다. 그 해석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붙드는 힘이 된다.
책 '적당히 착한 사람들의 고통'은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에서 태어났다. 홍 작가는 책을 기획할 때 현대인들이 가장 궁금해하거나, 현대 사회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현상을 고민한다고 했다.
이번 책은 그 두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피로한 현대인과 학생, 직장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한 행동, 거절의 어려움, 타인의 평가에 대한 극도의 민감성,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에 주목했다. "한국인들은 배려가 많고 친절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게 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습니다."
문화는 학습의 결과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익힌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어느 순간 사회의 규범이 된다. 홍 작가는 이 규범이 현대인을 피로하게 한다고 봤다. 동시에 그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인식이 마음에 심리적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 제목 속 '적당히 착한 사람'은 누구일까. 홍 작가는 "정말 착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끝없이 베푸는 순수 이타주의인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순수 이타주의란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했다. 사람은 남을 도우면서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거나, 그 친절을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홍 작가가 말하는 '적당히 착한 사람'은 일반적인 우리의 선함을 의미한다. 좋은 사람이길 바라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러나 그 욕망이 강박이 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게 된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착한 딸', '좋은 동료', '배려심 많은 이웃' 같은 평가가 더해진다. 그는 "문화적으로 내면화된 이러한 규범은 개인에게 무의식적인 압력으로 작용한다"며 "결국 자신의 심리적, 정서적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규범에 자신을 맞추려다 보니 자신의 내면적 필요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타인에게는 친절하지만 자신에게는 가혹한 심리의 뿌리도 문화와 연결된다. 홍 작가는 그 기준을 '행복의 정의'에서 찾았다. 개인주의 문화권인 북미에서는 자신의 행복과 기분이 행복의 기준이 되는 반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개인의 행복보다 집단의 안녕감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돌봐야 할 대상이 나인지, 타인인지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특히 자신의 안녕감을 제쳐두고 집단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봤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원하는 선택을 미루고, 피곤하더라도 친절을 베푼다. 그 이유는 집단에서 배제될 것 같은 공포가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홍 작가는 이를 '심리적 생존 전략'이라고 표현했다.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고통이 자신의 피로보다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계를 넘어선 친절을 계속 베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착함과 나를 소진시키는 착함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홍 작가는 기준을 '자신다움'에서 찾았다. "건강한 착함, 건강한 친절함은 자신이 그 행위를 할 때도, 또 하고 나서도 자신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정도가 있다. 나를 위해 쓰고 남은 에너지다. 문제는 그 이상을 끌어다 쓸 때 생긴다. 그때부터 사람은 소진되고, 마음속에서는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라는 말이 올라온다. 그 안에는 "내가 나를 잃어가면서 너에게 베풀었는데"라는 숨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구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홍 작가는 "오늘 내가 베푼 친절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 범위였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내가 해준 일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글쓰기는 사회심리학 이론을 일상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하지만 쉽게 쓰는 것과 가볍게 쓰는 것은 다르다. 그는 대중서를 쓸 때도 학술적 정확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논문을 쓸 때는 이런 말이 있어요. 단 한 줄도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쓰지 말아라." 홍 작가는 이 원칙을 대중서에서도 가능한 지키려 한다고 말했다.
순간의 이목을 끄는 글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정확함이 독자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연구자들의 언어로만 쓰면 정확한 전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경험담, 그림, 이야기 등 독자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를 찾는다. "학술적 엄밀함과 대중적 접근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적당히 착한 사람들의 고통'을 쓰며 가장 오래 고민한 문장이나 장면은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 일주일을, 한 달을 생각하면서 집필했다"며 "매일 겪었던 피로한 일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간편한 방법으로 편해질 수 있게 정리했다"고 털어놨다. "적당히 착함이라는 게 워낙 흔하고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현상이다 보니, 마치 땅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담듯이 쓸어 담는 기분이었다"는 그의 말은 이 책이 얼마나 일상에 밀착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홍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말은 "이제 그만 애쓰자"다. 그는 어느 날 관계에 피로를 느끼며 혼자 "내가 적당히 착해서 그래"라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모든 것이 이해됐다고 한다. 자신이 해왔던 일이 '적당히 착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책의 목적은 절반쯤 달성된다. 왜 피로한지도 모른 채 버티는 것보다, 왜 피로한지 아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기 때문이다. 원인을 아는 일은 불확실함을 제거하고 통제감을 회복하게 해준다.
몇 달 뒤 잠이 오지 않던 밤, 그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이제 그만 애쓰자." 이 말은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홍 작가는 독자들이 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길 바란다. "당신이 느끼는 피로는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적당히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 다만, 이제는 자신을 조금 더 돌보는 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의 앞선 저서인 '심리학이 말하는 그리움의 힘, 노스탤지아', '잘하는 거 할래? 좋아하는 거 할래?' 역시 넓게 보면 같은 질문 위에 놓여 있다. 홍 작가는 세 권 모두 자아 정체성을 다루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공유한다.
앞으로의 집필 계획도 이어진다. 홍 작가는 소설, 에세이, 드라마, 그림책, 동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심리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다. 올해와 내년에 각각 SF 소설과 어린이 자연 심리 동화를 출간할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장르는 달라 보여도 목적은 하나다. "타깃으로 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안전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 이것이 심리학자로서의 역할이자 책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email protected] 유선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