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각

[강남視角] 110만개 창업보다 중요한 것

파이낸셜뉴스
김기석 중기벤처부장
김기석 중기벤처부장

"창업이나 한번 해볼까." 취업 문턱에서 지친 청년이라면 한번쯤 품어볼 만한 생각이다. 지난 7월 청년실업률이 6.8%까지 오른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고민을 하는 청년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창업이 취업의 손쉬운 대안이라는 뜻은 아니다. 돈도 들고 규제도 복잡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그런데 의외로 한국은 창업하기 좋은 나라다. 근거 없는 자화자찬이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가정신 국제연구 프로젝트인 글로벌기업가정신모니터(GEM)에 따르면 한국의 2025년 국가창업환경지수(NECI)는 5.9점으로 조사대상 53개국 가운데 8위다. 전체 평균 4.8점을 크게 웃돈다.

반도체와 산업 경쟁력을 놓고 부쩍 비교되는 대만(2위)보다는 아쉽게 순위가 낮다. 그러나 일본 17위, 미국 20위보다는 한참 위에 있다. 특히 시장 역동성은 세계 1위였고, 물리적 인프라와 정부 창업지원 정책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장의 창업 열기도 뜨겁다. 지난해 국내 창업기업은 113만5561개, 일평균 3111개꼴이다.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다. 2024년 매출 1000억원을 넘긴 '벤처천억기업'은 985개에 달했다. 벤처기업 종사자는 93만여명으로, 국내 4대 대기업그룹 전체 고용보다 많다. 벤처 생태계가 우리 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나라는 창업 측면에서는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성장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른 숫자가 보인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기업생멸행정통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매출이나 고용이 연평균 20% 이상 증가한 고성장기업은 5403개로 전년보다 5.2% 줄었다. 창업 4~5년차의 젊은 고성장기업인 '가젤기업'도 1356개로 3.1% 감소했다. 2018년 생긴 기업 가운데 5년 뒤까지 살아남은 비율도 36.4%에 그쳤다.

창업의 문은 넓어졌지만 정작 고성장기업 수는 줄었다. 기업을 많이 태어나게 하는 것과 크게 키워내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이에 정부도 방향을 틀었다. 지난해 말 '벤처 4대 강국 도약 종합대책'을 내놓으며 정책의 무게중심을 '지원'에서 '성장'으로 옮겼다. 2030년까지 인공지능(AI)·딥테크 스타트업 1만개, 유니콘·데카콘 50개를 육성한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방향을 바꿨다면 평가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창업기업을 몇 개 더 만들었는지보다 그중 몇 개가 살아남아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창업지원 기업 수보다 5년 생존율을, 신규 창업 수보다 고성장기업과 가젤기업 수를 더 무겁게 볼 필요가 있다. 매출 10억원 기업을 100억원으로, 100억원 기업을 1000억원으로 키워내는 힘이 앞으로 창업정책이 증명해야 할 성과다. 창업을 넘어 '스케일업'이다.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를 바라보며 부러움과 위기감이 동시에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설립된 회사가 불과 10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주요 업체로 성장했다.

중국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과 거대한 내수시장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10년 된 기업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버티고 있는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했다. 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기업 하나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협력업체를 키우며 때로는 새로운 산업까지 만들어낸다.

앞으로 10년의 승부는 창업기업 수를 몇십만개 더 늘리는 데 있지 않다. 그 가운데 CXMT처럼 세계시장을 뒤흔드는 기업을 몇 개나 키워내느냐에 있다.

[email protected] 김기석 중기벤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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