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AI기업도 돈 빌린다…美 장기금리 19년 만에 최고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미국 경제지표가 둔화하고 기준금리 인상 전망까지 후퇴했지만 장기 국채금리는 거꾸로 치솟고 있다. 3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5.3%를 돌파하며 2007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란전쟁에 따른 고유가와 인플레이션 우려에 미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자, 인공지능(AI) 기업들의 천문학적인 자금 조달까지 겹치면서 장기 자금을 둘러싼 '돈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17일(현지시간) 미 30년물 국채금리는 장중 5.31%를 넘어서며 2007년 이후 약 19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10년물 금리도 4.7%를 넘어섰다. 국채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최근 경제 흐름만 놓고 보면 이례적인 움직임이다. 미국의 7월 소매판매가 예상 밖으로 감소하는 등 경제지표가 약화하면서 시장에서는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이 오히려 낮아졌다. 그럼에도 장기 국채금리는 상승했다.
월가는 금리 상승의 무게중심이 연준의 통화정책에서 미국의 재정과 채권 수급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국채 발행에 AI 투자 붐에 따른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까지 겹치면서 장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AI 투자 경쟁은 채권시장까지 흔들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알파벳과 아마존, 메타 등 AI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올해 들어 발행한 회사채는 약 2200억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전체 발행액 1080억달러의 두 배를 이미 넘어섰다. 골드만삭스는 주요 하이퍼스케일러 5곳의 회사채 발행이 올해 2500억달러에서 내년에는 40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데이터센터와 AI 칩, 전력망 구축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지면서 빅테크들이 보유 현금만으로 투자하지 않고 채권시장으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AI 관련 부채는 이미 올해 미국 투자등급 회사채 발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 정부 역시 막대한 돈을 빌려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부채가 40조달러에 육박하고 재정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와 AI 기업들이 동시에 장기 자금을 빨아들이면서 투자자들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블랙록투자연구소는 이를 '자본 희소성(capital scarcity)' 문제로 보고 있다. 과거 중앙은행이 대규모 채권 매입으로 시장의 공급 부담을 흡수했던 것과 달리 현재는 정부와 기업의 자금 수요를 민간 투자자들이 더 많이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주목할 부분은 물가 영향을 제외한 실질금리다. 미국 30년물 물가연동국채(TIPS)의 실질금리는 약 3%까지 높아졌다. 이는 투자자들이 물가상승분을 보전받고도 미국 정부에 30년간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연 3% 수준의 추가 수익을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다. 단순한 인플레이션 우려를 넘어 미국의 장기 자금조달 비용 자체가 높아지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지난 13일 실시된 250억달러 규모의 미 30년물 국채 입찰에서도 낙찰금리가 5.22%까지 올라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정부 조달금리를 기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40조달러에 육박하는 국가부채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이란전쟁도 장기금리를 밀어올리고 있다. 이날 브렌트유가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서면서 전쟁 장기화가 다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란과의 평화협정 가능성이 약해지면서 장기 인플레이션과 재정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국채금리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결국 시장의 관심은 '연준이 금리를 얼마나 더 올릴 것인가'에서 '미국 정부가 앞으로 얼마나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특히 경제지표가 둔화하고 연준의 추가 긴축 기대가 약해지는 상황에서도 장기금리가 오르는 것은 국채시장에 구조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와 AI 기업의 투자 경쟁, 이란전쟁발 인플레이션 위험이 동시에 장기 자금을 요구하면서 투자자들이 미국 장기채에 더 높은 '기간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구조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