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중요농업유산 제주밭담인데… 방문객 절반은 '우연히'
세계농업유산 관심 방문은 5.7%
해변·카페 왔다 들른 경우 48.6%
전담인력·운영예산 없어 상시관리 한계
월정리 소비 2년새 10.9% 감소
도 직영·민간위탁 거쳐 보존협의회로 전환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인정한 제주밭담을 알리기 위해 만든 테마공원이 정작 방문객에게 밭담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방문객의 절반 가까이는 월정리 해변이나 카페를 찾았다가 우연히 들렀고, 세계중요농업유산에 관심을 갖고 공원을 찾은 비율은 5.7%에 그쳤다.
19일 제주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정책연구 '제주밭담테마공원 활성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공원은 별도의 전담인력과 운영예산이 없어 밭담축제를 제외하면 상시적인 프로그램 운영과 시설관리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연구책임은 고선영 제주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맡았다.
제주밭담은 돌이 많고 바람이 강한 화산섬의 환경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밭에서 골라낸 현무암으로 담을 쌓으면서 발달한 농업시스템이다. 바람을 줄이고 토양 유실을 막는 기능뿐 아니라 농경지 경계와 공동체 문화까지 품고 있다.
전체 길이는 약 2만2108㎞로 추정된다. 검은 현무암 밭담이 제주 전역을 굽이굽이 이어가는 모습 때문에 '흑룡만리'로 불린다. 제주밭담 농업시스템은 2014년 4월 국내 농업유산 가운데 처음으로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제주도는 등재를 기념하고 밭담의 보전·전승과 관광 활용을 위해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제주밭담테마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주변에는 2.5㎞ 안팎의 진빌레 밭담길이 자리하고 제주밭담축제의 주요 행사장으로도 활용돼 왔다.
문제는 세계적 농업유산이라는 지위가 실제 방문 동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구진이 지난 4월 25일부터 5월 8일까지 제주밭담테마공원 방문경험자 105명을 조사한 결과 공원을 찾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월정리 인근 해변·카페 등을 찾았다가 우연히 방문'한 경우로 48.6%를 차지했다.
밭담축제 참가가 22.9%, 산책·휴식 목적이 18.1%로 뒤를 이었다. 세계중요농업유산인 제주밭담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방문객은 5.7%에 불과했다.
월정리를 찾는 목적에서도 밭담의 존재감은 약했다. 카페·맛집 탐방이 33.3%로 가장 많았고 바다·밭담 등의 경관 감상 32.4%, 휴식·휴양 21.9% 순이었다. 교육·문화체험 목적은 3.8%에 그쳤다.
조사 대상의 84.8%가 제주도민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연구진은 테마공원이 세계중요농업유산을 알리는 독자적인 관광목적지보다 월정리 관광 동선에서 잠시 들르는 공간에 머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방문객이 공원을 알게 된 경로도 지인 추천이 38.1%로 가장 많았다. 길거리 안내표지판 22.9%, 블로그·인터넷 16.2%, SNS 13.3% 순으로 나타나 디지털 홍보보다 입소문이나 이동 과정에서의 물리적 노출에 크게 의존했다.
공원에 머무는 시간과 실제 활동 사이에도 간극이 있었다. 방문객의 56.1%는 2시간 이상 체류했지만 주요 활동은 사진 촬영 33.3%, 공원 산책 30.7%, 밭담길 걷기 22.7%에 집중됐다.
밭담 체험 참여는 6.0%, 안내·정보센터 방문은 3.3%에 그쳤다. 연구진은 축제 기간 외에는 체험과 해설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지 않아 장시간 머물더라도 밭담의 역사와 농업적 기능을 깊이 이해할 기회가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방문객 평가도 같은 문제를 드러냈다. 공원의 가장 좋은 점으로는 밭담의 독특한 경관이 45.7%로 가장 높았지만 농업유산 관련 교육적 내용은 11.4%에 그쳤다.
불편사항으로는 안내표지·설명 부족이 절반을 웃돌았고 볼거리·즐길거리 부족도 50%를 넘었다. 5점 만점 만족도에서도 경관·자연환경은 3.8점으로 가장 높았지만 체험·프로그램 다양성은 2.4점으로 최하위였다. 안내·해설 정보 충분성과 전반적 관리상태도 각각 2.9점에 머물렀다.
방문객이 원하는 콘텐츠는 오히려 분명했다. 희망 프로그램을 복수로 물은 결과 밭담길 트레킹이 56.1%로 가장 높았고 밭담 쌓기 43.0%, 속돌 쌓기 42.1%, 주말 파머스마켓 26.2% 순이었다.
시급한 개선과제로도 체험 프로그램 확대가 55.1%로 가장 많이 꼽혔다. 인프라 확충 54.2%, 지역 맛집·마을관광 연계와 SNS·영상 홍보 강화가 각각 32.7%, 야간 프로그램 도입 29.0%로 나타났다.
공원 활성화는 월정리 관광경제와도 연결된다. 연구진이 신용카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월정리 관광소비는 2023년 133억5000만원에서 2024년 129억5000만원, 지난해 118억9000만원으로 2년 연속 줄었다. 2023년과 비교하면 10.9% 감소했다.
반면 외국인 관광객 소비는 2020년 6000만원에서 2024년 33억원으로 55배 증가했다. 지난해에도 31억3000만원 수준을 유지했다. 외국인이라는 새로운 방문층이 늘고 있지만 밭담테마공원으로 끌어들일 콘텐츠와 안내체계가 부족하다는 게 연구진의 판단이다.
공원 방문객의 89.5%가 방문 전후 월정리 식당이나 카페, 편의점 등을 이용한 점도 주목된다. 연구원은 밭담 체험과 관광 프로그램이 상설화될 경우 현재 음식점 중심의 소비를 문화·체험·쇼핑으로 확장할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관광 동선도 활용할 수 있다. T맵 자료를 분석한 결과 월정리 방문객은 김녕해수욕장~월정리~세화~성산을 잇는 제주 동부 해안축을 주로 이용했다. 하지만 제주밭담테마공원은 이 동선의 핵심 목적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연구원은 김녕 만장굴과 밭담을 연결하는 세계유산 코스, 세화오일장과 연계한 파머스마켓, 평대·덕천리 숙박거점 연계, 비자림·용눈이오름 중산간 생태코스, 동문재래시장으로 돌아가는 귀환 동선 등 5개 연계코스를 제안했다.
운영체계부터 손봐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제주도가 직접 운영하면서 전담인력과 연간 운영예산을 확보하고, 중기에는 민간 전문기관이나 지역조직 위탁으로 전환하는 단계적 방안을 제시했다.
장기적으로는 제주도와 행정시, 지역주민, 농협, 학계 등이 참여하는 가칭 '제주밭담보존협의회'를 만들어 테마공원뿐 아니라 제주 전역의 밭담 보전·활용·홍보를 총괄하도록 하는 방안도 내놨다.
콘텐츠로는 제주 자생식물 황근과 밭담을 결합한 경관 조성, 상설 생태해설, 주민이 함께 농사짓는 생명텃밭, 진빌레 밭담길과 당처물동굴을 걷는 '월정리 진빌레 밭 한끼 소풍', 밭담을 쌓는 석공인 '돌챙이'의 이야기를 활용한 체험 등이 제시됐다.
제도 보완도 과제로 꼽혔다. 연구원은 현행 '제주특별자치도 농어업유산 보전 및 관리 조례'에 전담 실행기구와 예산·인력 확보, 민간위탁, 수익사업과 지역사회 환원 등의 근거를 보다 명확하게 담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세계중요농업유산이라는 이름만으로 관광객이 찾아오는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는 게 이번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다. 제주밭담의 경관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계가 인정한 이유와 제주인의 농업 지혜를 방문객이 직접 듣고 체험할 상설 콘텐츠와 운영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흑룡만리'의 세계적 가치는 월정리 해안길의 우연한 방문지에 머물 수 있다는 지적이다.
[email protected]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