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 월드조의 체코 챔피언, 루카시 포드페라[세계바둑산책⑫]
일곱 살에 아버지에게 배운 바둑, 열일곱 살에 한국을 찾았던 소년의 바둑 여정
[파이낸셜뉴스]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은 출전 부문에 따라 출발하는 날짜가 다르다. 한국·중국·일본·대만 선수들은 본선 티켓을 얻기 위해 대진에 따라 5승에서 6승을 거둬야 한다. 반면 이들 네 나라를 제외한 선수들이 경쟁하는 월드조는 4승을 거두면 단 한 장의 본선 티켓을 손에 넣는다. 필요한 승수가 다른 만큼 출발선도 달랐다. 월드조는 한국·중국·일본·대만 선수들의 예선보다 하루 늦게 시작됐다.
8월 27일 오전, 제31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통합예선 개막 이틀째이자 월드조의 첫날이었다. 한국기원 대국장에는 한국·중국·일본·대만 등 바둑 4강의 수백 명 선수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았고, 그 사이에서 10여 명의 월드조 선수들도 저마다의 꿈을 걸고 바둑판에 몰입하고 있었다.
월드조 첫 대국이 끝난 오후, 한국기원 옆 유전다방에서 체코 대표로 출전한 체코 챔피언 루카시 포드페라를 만났다. 오래된 바둑 전통을 이어가는 커피숍의 은은한 커피 향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그에게 바둑을 언제 처음 배웠느냐고 물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그의 바둑 입문은 『히카루의 바둑』을 보고 바둑에 빠진 유럽의 여러 강자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바둑을 배운 그는 일곱 살에 처음 돌을 잡았고, 불과 다섯 해 뒤인 열두 살에는 이미 유럽 6단에 오르며 유럽 바둑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체코의 바둑 인구가 궁금해 물었다. 그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체코바둑협회의 데이터베이스를 보여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는 적극적인 바둑인은 약 200명, 한 번 이상 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있는 회원은 약 1,300명에 이른다.
그가 화면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앞에 놓인 작은 목조 펜던트였다. 그 위에는 체코의 수도, PRAGU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체코 바둑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작은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열두 살에 유럽 6단으로 성장한 그는 5년 뒤인 열일곱 살 무렵 특별한 한국 인연도 만들었다. 헝가리에서 바둑 보급 활동을 했던 김성래 9단의 주선으로 한국에 와 충암도장에서 약 3개월 동안 바둑을 수련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열일곱 체코 소년에게 당시 한국은 세계 최강의 바둑을 직접 배우는 교실이었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체코 챔피언에 올랐고 지난 10여 년간 유럽을 대표하는 정상급 기사 가운데 한 명으로 활약해왔다.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세 차례 3위에 올랐으며 유럽 각지의 국제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무총리배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도 다섯 차례 체코 대표로 출전했고,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WAGC)와 국무총리배(KPMC)에서는 모두 4위까지 올랐다. 세계 아마바둑 무대에서 루카시라는 이름은 이미 낯설지 않다. 큰 키 때문에 어느 대회장에 있어도 금세 눈에 띄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와 유럽 정상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선수들 가운데 여러 명은 이후 유럽바둑연맹의 프로기사가 됐다. 그 역시 유럽 프로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다.
바둑은 이제 취미를 넘어 그의 직업이 됐다. 현재 약 10명의 정기 개인 제자를 가르치고 있으며 대부분 단급의 실력을 갖춘 제자들이다. 선수로서 자신의 승부를 계속하는 한편 강한 아마추어들을 지도하며 바둑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날 저녁, 한국기원에서 멀지 않은 잠실야구장에서는 또 한 명의 바둑기사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이세돌 9단이었다.
LG 트윈스와 NC 다이노스의 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선 이세돌은 등번호 100번이 새겨진 LG 유니폼을 입고 잠실 마운드에 올랐다.
이세돌이 프로기사가 된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그리고 이날 만난 체코 챔피언 루카시 역시 열두 살에 유럽 6단으로 성장해 더 강한 바둑을 배우기 위해 5년 뒤인 열일곱 살에 한국을 찾았다.
한 사람은 열두 살에 프로가 되어 훗날 세계 바둑의 전설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열두 살에 유럽 6단이 된 후 열일곱 살에 먼 체코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세계 바둑을 향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난 두 바둑 인생이었다.
삼성화재배 월드조 이틀째, 체코 챔피언의 이번 걸음은 잠시 멈췄다. 러시아 챔피언 알렉스를 꺾고 올라온 싱가포르의 천재 소년 쉬샤오판(Xu Xiaofan) 앞에서 올해 삼성화재배 본선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한국에서의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다음 달 7일 문경에서 개막하는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도 체코 대표로 출전할 예정이다. 그의 부인은 체코바둑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선수와 협회장, 바둑으로 맺어진 부부가 함께 체코 바둑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삼성화재배에서 첫 도전은 마무리됐지만 그의 다음 무대는 문경으로 이어진다.
일곱 살에 바둑을 시작해 10년 뒤 열일곱에 한국을 찾았던 소년은, 이제 세계 바둑의 부흥을 위해 힘쓰는 지도자이자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세계바둑인으로서 자신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