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중견국 외교 큰 그림 그려야
세상이 어지러워서 그런지 국제관계와 질서에 관한 담론들이 넘쳐난다. 그중 중견국 담론이 유독 필자의 눈길을 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가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중견국 연대 담론으로 포문을 열었다. 강대국 일방주의에 순응하기보다는 중견국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해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미 국방부 차관 엘브리지 콜비는 미국 주도 동맹을 옹호하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중견국 모임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은 헛되다고 반박했다.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중견국, 중견국 연대, 그에 대한 비판, 재반박이 쏟아진다. 중견국론에 대한 반박은 대부분 콜비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견국이라는 외형만 같을 뿐 개별 국가들이 가진 이익이 너무 달라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강대국 없이 중견국 협력만으로 국제질서를 새로 쓸 수 없다는 반박이 주를 이룬다.
반대 쪽에서는 중견국 연대가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며 제한된 범위와 영역에서 중견국들이 강대국의 일방주의를 견디고 새로운 규칙을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중견국 담론과 논쟁을 회피할 길은 없다. 자천타천으로 중견국 목록에서 한국이 계속 거론된다. 한국이 스스로 중견국임을 내세운 것은 이명박 정부 시기다. 거의 20년 전이다. 중견국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며 우리 사회는 대규모 국제회의와 행사 유치, 다양한 글로벌 랭킹에서 순위 상승, 세계 1~2위를 다투는 한국 기업의 신화, 세계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서 한국이 중견국임을 확인했고, 자부심을 느꼈다.
이후 대통령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한국은 꾸준히 스스로를 중견국으로 내세웠다. 이재명 정부도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만드는 외교를 지향한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한국이 중견국임을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중견국으로서 져야 할 책임과 부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세상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이제서야 이런 고민을 한다면 조금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이 혼란한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상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런 비전이 명확해야 구체적인 대외정책도 일관성을 갖춘다. 한반도 문제, 한미 동맹, 지역 안보 문제 등 안보 관련 사안, 주변 국가와 양자 관계, 무역과 투자는 물론이고 경제안보와 관련된 대외 경제정책, 공적개발과 국제 인권, 환경, 인공지능과 디지털 관련 대외정책 등 우리 외교의 중요 사안이 모두 중견국으로서 한국 대외정책이 가진 비전을 감안해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 외교정책은 진행되는 중견국 논쟁을 충분히 살펴보고 그 안에서 우리 역할과 위치를 확인하며 우리 덩치와 능력, 지향하는 가치에 맞는 중견국 외교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외교정책도 우리 사회의 한 편린이다. 우리는 높아진 한국 위상에 대한 뿌듯함 뒤에 따라오는 책임과 부담을 질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함께 되어 있는지 고민하고 가능한 한 빠른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