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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금융의 중심 싱가포르, 이제 바둑에도 눈을 돌리다[세계바둑산책⑭]

김성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싱가포르 바둑의 국제 진출과 유소년 바둑 육성

국제금융의 중심 싱가포르, 이제 바둑에도 눈을 돌리다[세계바둑산책⑭]

[파이낸셜뉴스]1989년 9월, 싱가포르 웨스틴 스탠퍼드 호텔에서 조훈현 9단은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이 우승은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으로 도약하는 출발점이 됐고, 싱가포르는 세계 바둑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순간을 지켜본 무대가 됐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국토도 자원도 부족했던 작은 섬을 세계적인 금융·물류 중심지로 일으켜 세웠다.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 8만9천 달러를 넘어선 싱가포르의 눈부신 성장은 사자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지닌 머라이언이 물줄기를 뿜고, 그 건너편으로 마리나 베이 샌즈가 우뚝 솟은 풍경 속에 압축돼 있다. 그렇다면 이 작지만 강한 나라에서 바둑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국제금융의 중심 싱가포르, 이제 바둑에도 눈을 돌리다[세계바둑산책⑭]

싱가포르 바둑의 조직적인 성장은 1981년 싱가포르바둑협회 창립과 함께 시작됐다. 협회에 따르면 창립 당시 100명가량이던 바둑 인구는 현재 25만 명을 넘어섰다. 협회 회관과 지역 학교에서는 매년 3,000명 이상의 학생이 바둑을 배우고 있으며, 약 20개 교육기관과 커뮤니티클럽이 바둑 보급에 참여하고 있다. 해마다 12개가 넘는 국내 대회를 개최하고 국제대회에도 꾸준히 대표선수를 파견하면서 바둑의 저변과 경기력을 함께 키워왔다.

싱가포르 바둑의 국제화를 보여준 대표적인 결실은 2024년 창설된 '남양배(南洋杯) 세계바둑마스터스'다. 싱가포르바둑협회와 중국바둑협회가 오랜 교류를 바탕으로 공동 창설한 이 대회는 두 나라 바둑협회가 함께 주최한 최초의 세계프로바둑대회다. 개막식에서는 양 협회가 바둑 보급과 유망주 육성을 위한 전략적 협약도 체결했다.

제1회 대회에는 세계 정상급 기사 32명이 출전했다. 32강부터 준결승까지는 2024년 11월 중국 청두에서 열렸고, 결승과 3·4위전은 2025년 2월 싱가포르에서 진행됐다. 특히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기사들에게 별도의 출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존 세계대회의 외연을 넓혔다.

결승에서는 한국의 신진서 9단이 중국의 왕싱하오 9단을 2대0으로 꺾고 초대 우승자가 됐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결승 기간에는 조훈현·녜웨이핑·다케미야 마사키가 참가한 '레전드 마스터스'를 비롯해 세계아마추어초청전과 학교 바둑 보급행사도 함께 열렸다. 남양배는 단순히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에 머물지 않았다. 중국의 두터운 바둑 기반과 싱가포르의 국제적 연결성을 결합해 세계 바둑의 지평을 동남아시아로 넓히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국제금융의 중심 싱가포르, 이제 바둑에도 눈을 돌리다[세계바둑산책⑭]

싱가포르바둑협회는 남양배 창설을 계기로 유망한 청소년 선수들을 중국에 보내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이러한 국제교류와 청소년 육성의 토대 위에서 마침내 싱가포르 최초의 프로기사도 탄생했다.

2010년생 천이항(陳奕航·Chen Yihang)은 2023년 싱가포르 선수 최초로 일본기원 원생이 된 뒤, 2025년 동계기사채용시험에서 10승 5패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2026년 3월 일본기원 프로 초단으로 공식 입단하며 싱가포르 바둑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싱가포르 바둑의 성장은 같은 해 8월 중국 충칭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중국어 신문 《연합조보(聯合早報·Lianhe Zaobao)》는 평균 나이 18.4세의 싱가포르 대표팀이 '백마산배 동남아시아 바둑초청대회'에서 개최지 충칭팀을 3대2로 꺾고 우승했다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5명의 대표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출전한 쉬샤오판은 대회에서 3전 전승을 거뒀다. 특히 충칭팀과의 결정적인 대국에서 중국 아마 6단 허훙쯔를 꺾어 싱가포르의 우승을 이끌었다. 젊은 싱가포르 대표팀이 강호 충칭팀을 제압한 것은 싱가포르 바둑이 보급과 저변 확대의 단계를 넘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 상승세는 불과 일주일 뒤 서울에서도 이어졌다. 15세 쉬샤오판은 왕십리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31회 삼성화재배 월드조에서 우승해 단 한 장뿐인 본선 진출권을 차지했다. 싱가포르 선수로는 처음으로 삼성화재배 본선에 오르며 자국 바둑의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다. 《연합조보》는 이를 '싱가포르 제1호'의 탄생으로 전하며, 쉬샤오판이 백마산배에 이어 2주 연속 정상에 올랐다고 소개했다. 천이항과 쉬샤오판의 등장은 우연한 결실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학교 교육에서 국가대표 육성으로 이어지는 싱가포르바둑협회의 체계적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협회의 교육 부문은 집행위원회 산하 교육위원회(EXCO Education Group)가 총괄한다. 교육위원회는 학교 바둑과정과 학기별 정규강좌, 방학 특강, 외부기관과의 협력 교육과정 등을 운영하며 어린이들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바둑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제금융의 중심 싱가포르, 이제 바둑에도 눈을 돌리다[세계바둑산책⑭]

학교와 지역 교육기관에서 바둑을 배운 학생 가운데 재능과 성장 가능성이 확인된 유망주는 한 단계 높은 전문교육을 받는다. 이들은 집중훈련과 선발 과정을 거쳐 국가 유소년대표팀에 합류하고, 국내외 주요 대회에 출전하며 실전 경험을 쌓는다. 국가 유소년대표팀(National Youth Team)은 국가 엘리트 스쿼드(National Elite Squad), 국가대표팀(National Team)과 함께 협회의 핵심 선수 육성 조직으로 편성돼 있다. 전체 교육과 대표팀 훈련은 싱가포르바둑협회 총감독인 양진화(楊晉華) 프로 6단이 이끈다. 프로기사의 전문적인 지도 아래 유망주들은 체계적인 훈련과 실전 대국, 복기를 병행하며 국제대회에 대비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학교 바둑교육-정규 교육과정-유망주 발굴-국가 유소년대표팀-국제대회 출전'으로 이어지는 성장 경로가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 바둑의 보급과 엘리트 선수 육성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연결함으로써 바둑 인구의 기반을 넓히는 동시에 세계무대에 도전할 차세대 선수도 지속적으로 길러내고 있다. 여기에 중국바둑협회와의 교류, 중국 현지 훈련, 남양배와 같은 국제대회 개최가 더해지면서 싱가포르의 유소년 선수들은 이전보다 넓은 무대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됐다. 국내 교육과 국제교류, 실전 출전이 하나의 선순환 구조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싱가포르바둑협회는 일반회원·학생회원·법인회원·평생회원 제도를 운영하며, 현재 평생회원만 280명이 넘는다. 일반회원과 평생회원이 참여하는 정기총회는 매년 7월 말 이전에 열리고, 2년마다 회장을 비롯한 집행위원회를 선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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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장 제임스 리 신치앙(James Lee Xinqiang)은 동남아시아 아마추어 기사 가운데 최초로 일본기원(Nihon Ki-in)으로부터 아마추어 7단을 공식 인정받은 선수로, 2025년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싱가포르 바둑대표팀 단장을 맡았고, 현재도 국가 유소년대표팀 지도와 학교 바둑교육에 직접 참여해 매주 300명이 넘는 학생과 수련생을 가르치는 현장형 지도자다. 9월 6일부터 13일까지 경북 문경에서 열리는 제46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에도 싱가포르 선수단이 참가한다. 7일 개막식에 이어 8일부터 본격적인 대국이 시작되는 이번 대회에는 2011년생 천이한 5단이 싱가포르 대표선수로 출전하고, 제임스 리 신치앙 협회장이 임원으로 동행한다. 국제금융과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한 작지만 강한 나라 싱가포르가 유소년 육성과 국제교류를 발판으로 세계 바둑의 새로운 거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최채우 한국기원 이사
최채우 한국기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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