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백면서생의 위험성
권력 쥔 학자들, 현실정치 대부분 실패…이상과 실제의 벽 카니의 상식 깬 모험 주목…'잃어버린 10년' 캐나다, 또 실패 시 진짜 위기
[율곡로] 백면서생의 위험성
권력 쥔 학자들, 현실정치 대부분 실패…이상과 실제의 벽
카니의 상식 깬 모험 주목…'잃어버린 10년' 캐나다, 또 실패 시 진짜 위기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백면서생(白面書生)은 글만 읽어 지식은 풍부하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뜻한다. 책상물림, 글방 도령 등이 유의어인데, 모두 부정적 뉘앙스다. 이론엔 강하나 실전 경험 없는 학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곱지 않다. 역사적으로 백면서생이 권력을 잡았을 때 부작용이 생긴 사례가 대부분이어서다. 학자와 이론가들이 이상주의와 학문적 상상력만 믿고 현실 구조와 현장 작동 원리를 무시해 국가 재앙을 부른 사태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우리 역사에선 유학자 조광조가 대표적이다. 중종의 신임을 얻어 실세로 떠오르자 성리학 이상국을 건설한다며 급진 개혁에 몰두했다. 근본주의자답게 유교 도덕 질서를 세운다며 중국식 '향약'을 전국 향촌에 강제 설치했고, 모든 백성을 성리학자로 만들겠다며 소학(小學)을 강제로 읽혔다.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평민들에겐 고통이었다. 향약 운영비로 내야 할 세금이 늘고, 유교 예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 등 민생이 파탄 났다. 백성들은 감세와 관개시설 확충 등 실질적 개혁을 원했지만, 조광조는 도덕과 예절만 바로 잡히면 다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의 기득권 청산도 미숙했다. 주류 훈구파의 반대에도 과거 시험을 추천제로 바꾸고 도교 기관(소격서)을 없앴다. 반정 때 거짓 공을 세운 기득권층이 있다며 공신 박탈도 추진했다. 기득권의 반격을 고려해 정교하게 제거해야 하지만, 방법이 거칠고 서툴렀다. 결국 '기묘사화'가 터져 숙청과 정쟁에 국가 행정이 마비되니 각지에서 농민 수탈만 늘었다. 이념에 집착한 백면서생이 굶주린 백성에 양식 대신 도덕책을 줬고, 어설프게 기득권을 건드려 정국을 혼란케 함으로써 민생을 더 큰 도탄에 빠뜨린 것이다.
외국 사례도 많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총리였던 경제학자 하인리히 브뤼닝은 대공황이 오자 부양책 대신 당시 정통 이론인 긴축을 고집했다. 그러자 실업률이 폭등해 민생경제가 파탄 났고, "빵을 주겠다"고 선동한 히틀러의 나치당이 반작용으로 급부상했다. 결국 그 '나비 효과'는 세계사 전체를 뒤바꿨다. 가나 초대 대통령 콰메 은쿠르마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과 영국 유학파인 그는 연구실 책상 위에서 다듬어온 범아프리카주의와 사회주의 이상론을 여건도 못 갖춘 신생 독립국에 이식하려다 실패했다. 기업 국영화, 국가 주도형 사업 등에 국고를 쏟아붓다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서민 경제가 붕괴했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처럼 학자 출신 중 성공한 예외도 있지만 소수다.
학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왜 대부분 실패할까. 하는 일의 속성과 요구되는 역량이 직업 정치인과 많이 다른 게 원인이다. 학문은 원칙과 정답을 찾는 과정이지만, 국정은 차악을 택하는 타협의 연속이다. 학자들은 협상보다 명분과 원칙을 중시하므로 현실적 판단에 약하다. 심지어 반대 의견을 악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인간 본성을 잘 못 읽는 것도 문제다. 학문 이론은 인간을 '합리적 주체'로 가정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정책이 현장에 적용될 때 관련 주체들이 실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자들은 의도의 정당성이 결과의 정당성까지 보장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도는 선하므로 결과가 나빠도 잘못은 아니다"라는 도덕적 오만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결과물의 성패로 평가된다.
지금 학자 출신 지도자의 파격적 정치 실험이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은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다.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에 이어 콧대 높은 영국중앙은행(BOE)의 첫 외국인 수장까지 지낸 저명 경제학자다. 투자은행 경력도 있으나 본질은 이론 중심 학자형 엘리트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 문외한인 카니가 급기야 작년 봄 집권 자유당 대표로 선출돼 총리에 올랐다. 당시는 국가적 위기였다. 전임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오랜 실정으로 캐나다는 재정 악화, 소득 정체, 고용 불안 등에 시달렸다. 집값 폭등, 물가 상승, 과도한 규제에 따른 생산성 약화 등은 특히 서민과 중산층 삶을 무너뜨렸다. 이는 모두 트뤼도의 급진 이상주의 탓으로 진단됐는데도, 캐나다 표심은 정권 교체 대신 '카니 카드'를 꺼낸 자유당에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당시 커졌던 '반미 반트럼프 정서'가 작용한 덕으로 분석됐다.
문제는 카니의 행보가 전임자보다 더 불안해 보인다는 점이다. 외교 분야에선 무모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캐나다는 '무임승차' 얘기가 나올 만큼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통상에서도 막대한 대미 흑자를 본다. 대미 수출이 전체의 4분의 3 이상일만큼 의존도도 과도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칭하며 도발한 건 이런 종속 관계를 부각하려는 특유의 화법이다. 이처럼 캐나다 외교에서 미국은 중요한 나라 이상의 '생존선'이지만, 카니는 취임 후 친중(親中) 기조를 오히려 강화하고 미국의 패권 강화에 맞서는 중견국 기수를 자처해 불필요하게 미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특히 최근 미국과 보복 관세를 주고받으며 무역전쟁 구도를 형성한 건 외교 상식을 무시한 행동이란 지적이 나온다. 상대국에 큰 무역흑자를 내며 안보와 통상 모두 의존하는 비대칭적 종속 관계의 나라가 정면 대결을 외친 건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기지 못할 전쟁을 하는 리더는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카니의 행보가 자해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정학, 안보학, 통상학의 상식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반트럼프 정서에 힘입어 총리가 된 만큼 속칭 '사이다 발언'으로 지지층에 감정적 쾌감을 주고, 세계 최강 지도자에 맞서는 이미지로 지지율을 띄우려는 '국내용 정치쇼'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미 이상 조짐이 감지된다. 카니가 주도한 '다국적 방위은행' 설립은 김빠지는 분위기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7개국(G7) 국가들부터 외면하고 있다. 주요 강국이라면 최강대국과 맞붙겠다는 나라가 주도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본능과 상식으로 안다. 만일 카니의 이상주의 명분론이 실패로 귀결되면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캐나다의 미래는 더 암울해진다. 부와 명성을 가진 카니는 총리직만 내놓으면 그만이지만, 다수 국민과 사회적 약자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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