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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을 바둑판으로 본 기업인, 코삭[세계바둑산책⑮]

김성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세븐일레븐의 전국 확장에서 학교 바둑과 유소년 육성까지

태국을 바둑판으로 본 기업인, 코삭[세계바둑산책⑮]

[파이낸셜뉴스] CP그룹은 1921년 중국계 이민자가 방콕에서 시작한 종자상을 모태로 성장해, 현재 23개 국가·경제권에서 45만 명이 넘는 임직원을 거느린 태국 최대급 복합기업집단이다.

종자와 사료에서 출발한 CP그룹은 축산·식품을 넘어 유통, 통신, 디지털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이 가운데 그룹의 유통사업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기업이 태국에서 세븐일레븐(7-Eleven)을 운영하는 CP ALL이다. CP ALL의 성장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코삭 차이라스미삭(Korsak Chairasmisak)이다. CP그룹의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한 그는 CP ALL을 이끌며 세븐일레븐 사업을 태국 전역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성장 전략의 중심에는 뜻밖에도 바둑이 있었다.

"태국 전체를 하나의 바둑판으로 바라봤다."
코삭의 이 한마디는 그의 경영철학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는 바둑판의 요처에 돌을 놓듯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세븐일레븐 점포를 배치하고, 개별 점포의 승부보다 전체 유통망의 연결과 확장을 중시했다. 1989년 방콕 팟퐁에 1호점을 연 세븐일레븐은 빠르게 점포망을 넓혀갔다. 코삭이 태국 바둑클럽을 창립한 1993년에는 지방으로까지 사업망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1,000호점을 돌파했다. 세븐일레븐의 전국 확장과 태국 바둑 보급이 같은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오늘날 태국 전역에 구축된 세븐일레븐 점포는 1만6천여 개에 이른다. 코삭에게 이 거대한 점포망은 태국이라는 바둑판 위에 하나하나 놓아온 '포석'과도 같았다.

태국을 바둑판으로 본 기업인, 코삭[세계바둑산책⑮]

코삭과 바둑의 본격적인 인연은 1983년 홍콩 근무 시절 깊어졌다. 당시 CP그룹의 국제무역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과 일본 기업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둑을 접했다. 이후 일본인 친구의 소개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태국인 바둑 강자 코사 아리야(Kosa Ariya)를 만나 본격적으로 바둑의 전략과 철학을 배웠다. 바둑에 매료된 코삭은 이를 개인적인 취미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93년 8월 25일 태국 바둑클럽(Thailand Go Club)을 창립하고 본격적인 바둑 보급에 나섰다. 작은 바둑클럽으로 출발한 이 조직은 활동 영역을 넓혀 2003년 태국바둑협회(Go Association of Thailand)로 발전했다. 코삭의 오랜 바둑 보급 활동은 국제 바둑계에서도 인정받았다. 2015년 방콕에서 제36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WAGC)가 열린 것을 계기로, 일본기원은 태국 바둑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코삭에게 명예 7단을 수여했다.

이 과정에서 코삭과 함께 태국 바둑의 현장을 지켜온 인물이 반타니 나마손티(Vanthanee Namasonthi) 여사다. 초기에는 바둑클럽의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고, 이후 태국바둑협회 부회장을 맡아 국내 바둑 보급과 국제교류를 오랫동안 담당했다. 코삭이 태국 바둑의 큰 그림을 그렸다면, 반타니는 그 구상을 현장에서 실행해 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반타니 여사는 한국 바둑계와도 인연이 깊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무총리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KPMC)에 태국 측 임원으로 참가하는 등 바둑 교류를 위해 한국을 찾은 횟수만 10회를 넘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20여 년 동안 외국인 바둑 교류에 앞장서 온 한국여성바둑연맹 해외홍보 이사 김향희 여사와 오랜 친분을 이어오며 한국과 태국의 민간 바둑교류에도 가교 역할을 해왔다.

태국을 바둑판으로 본 기업인, 코삭[세계바둑산책⑮]

이처럼 태국 바둑의 성장은 국내 보급에만 머물지 않았다. 코삭이 바둑 보급의 방향을 제시하고 반타니가 국내외 교류의 현장을 꾸준히 이어가면서 태국 바둑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세계 바둑계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태국 바둑의 성장에는 CP ALL의 조직력과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삭은 바둑을 단순한 승부의 기술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에게 바둑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부분에 매몰되지 않은 채 전체를 바라보며 판단하는 사고훈련이었다. 이러한 바둑의 사고방식은 기업 경영을 넘어 인재 교육으로 이어졌다. 세븐일레븐의 점포망이 빠르게 확대되자 코삭은 사업 현장에 필요한 인재를 직접 양성하기 위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판야피왓 기술교육기관을 시작으로 교육 영역을 넓혀 판야피왓 경영대학(Panyapiwat Institute of Management·PIM)과 PIM 부속학교(Satit PIM)에 이르는 교육체계를 구축했다. 단순히 세븐일레븐에서 일할 인력을 길러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전략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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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코삭이 교육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 다시 바둑이었다. PIM 부속학교에서는 코삭의 제안으로 바둑을 교육과정에 포함해 모든 학생이 매주 1교시씩 바둑을 배우도록 했다. 바둑을 잘 두는 선수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둑을 통해 집중력과 판단력, 전략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려는 시도였다. 기업 경영에 활용했던 바둑의 철학을 교실로 옮긴 셈이다. 코삭이 교육 현장에 뿌린 바둑의 씨앗은 이후 태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태국바둑협회는 유치원과 초·중·고교, 직업학교와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과 연계해 바둑 보급을 추진해 왔다. 일부 학교에서는 바둑을 기본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교육과정에 편성하면서 바둑은 방과후 취미활동을 넘어 학교 교육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태국바둑협회가 2026년 밝힌 태국의 바둑 인구는 100만 명 이상이다. 이는 모두가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선수를 의미하기보다는 바둑을 배우고 경험한 폭넓은 인구를 포함한 수치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주목할 점은 이처럼 넓어진 바둑 저변의 상당 부분이 학교와 청소년 교육을 통해 형성돼 왔다는 사실이다.

태국을 바둑판으로 본 기업인, 코삭[세계바둑산책⑮]

학교에서 시작된 바둑은 이제 유소년 선수 육성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2026년 태국바둑협회는 6~16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 고 패스트트랙(Young GO Fast Track)’을 출범시켰다. 전문적인 지도를 통해 유망주를 발굴하고 국내외 대회에 출전할 차세대 대표선수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학교에서 바둑을 접한 학생 가운데 재능을 보이는 유소년이 전문교육과 대회로 진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태국 학교바둑리그(Thailand Go School League)에서도 확인된다. 2026년 대회에는 쭐랄롱꼰대학 부속초등학교, 방콕 크리스천 칼리지, 세인트가브리엘학교, 어섬션학교, PIM 부속학교 등 여러 학교가 팀을 구성해 참가하고 있다. 코삭이 시작한 ‘교육으로서의 바둑’이 학교 교육에서 유소년 선수 육성으로, 다시 학교 간 경쟁과 전국적인 바둑 저변 확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993년 작은 바둑클럽에서 출발한 태국 바둑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100만 명이 넘는 바둑 인구를 기반으로 학교 교육과 유소년 엘리트 육성을 함께 추진하는 단계로 성장했다.

태국 바둑의 국제무대 진출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문경에서 열리는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WAGC)에는 태국 랭킹 1위 위치리치 카루하와닛(Wichrich Karuehawanit·맥스)이 대표선수로 출전하며, 중국 프로기사 시진보가 감독을 맡는다. 태국바둑협회 회장을 포함해 선수와 임원 등 모두 4명으로 구성된 태국 선수단이 문경을 찾는다. 맥스는 이번 WAGC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다른 선수단보다 일찍 한국을 찾았다. 현재 해외 바둑 보급에 꾸준히 앞장서 온 조혜연 9단의 PBA 바둑아카데미에서 집중훈련을 받으며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1989년 세븐일레븐 1호점과 1993년 태국 바둑클럽에서 시작된 두 개의 작은 ‘포석’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 1만6천여 개의 점포와 100만 명이 넘는 바둑 인구라는 두 개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최채우 한국기원 이사
최채우 한국기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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