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국 칼럼] 마그나 카르타가 한국 대학에 묻는 것
"1988년 세계 388명 대학총장 모여
대학의 독립성과 자율성 공식선언
현재 우리에게는 공허한 메아리
대학 재정 어려워 정부사업에 의존
산학협력 확대, 관련규제 완화하고
연구성과가 날 때까지 기다려줘야"
1988년, 세계 각국에서 모인 388명의 대학 총장들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대학이 대학답기 위해 지켜야 할 보편적 원칙'을 담은 '마그나 카르타(대학헌장·Magna Charta Universitatum)'에 서명하고 이를 공식 선언했다. 이 헌장의 핵심은 대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다. 연구와 교육은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며, 자율성이야말로 대학이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선언이 오늘의 한국 대학사회에서는 왜 이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것일까. 학령인구는 급감하고 16년간 이어졌던 등록금 동결로 대학 재정은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변화까지 밀려오고 있어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물어야 할 전환기다. 그럼에도 정작 대학이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는 데 가장 필요한 '독립성과 자율성'은 점점 사치스러운 말처럼 취급되고 있다.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학들은 정부 재정지원사업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일부 대학에게 정부 재정지원은 교육·연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기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정부가 제시한 평가지표에 맞추는 데 익숙해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영역마저 외부 기준에 맡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사업에 선정됐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매년 돌아오는 평가에 대비해 정해진 지표를 달성하고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상당한 행정력이 투입된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엄정한 평가와 책임성 확보는 당연하다. 그러나 대학이 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과연 이러한 평가가 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담보하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대학은 눈앞의 성과를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을 정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대학 역시 정부사업에 선정되고 평가에 대응하는 데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을 약화시켜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율성은 정부가 보장해 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 지키고 책임져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유력 사립대학이 '정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건학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원사업에 신청조차 하지 않았던 사례는 신선하다. 모든 대학이 이를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학 스스로 교육철학과 판단의 기준을 지켜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학의 자율성은 특권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해법은 무엇일까. 정부 재정지원사업을 없애자는 것도, 대학에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첫째, 정부 재정지원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대학 스스로 독립과 자율이라는 핵심 가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대학사회는 정부의 지원 규모와 배분방식에 대해서는 많은 목소리를 내왔지만, 정작 사업 구조가 대학의 자율성과 각 대학이 추구하는 교육철학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 이제는 사업 설계 단계부터 대학의 자율성 보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둘째, 재정지원사업의 궁극적 목표 가운데 하나는 대학의 재정적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어야 한다. 사업이 끝날 때마다 또 다른 정부사업을 찾아 나서는 구조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재정지원을 발판으로 대학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고 산학협력을 확대해 스스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과감히 완화해야 한다.
셋째, 평가는 단기·중기·장기 목표를 구분해야 한다. 매년 사업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교육과 연구의 성과를 1년 단위 숫자로 모두 측정할 수는 없다. 인재를 키우고,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며, 지역과 산업을 변화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대학의 책무성 못지않게 성과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정책적 인내도 필요하다. 그것이 오히려 국민의 세금을 제대로 쓰는 길이다.
올해 마그나 카르타 회의는 오는 10월 중순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다. 세계 대학들이 다시 모여 자유와 자율,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1988년 볼로냐에서 울려 퍼졌던 '대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선언이 우리 대학들에게 또 한 번의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동서대 총장
■약력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박사 △27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 △22대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장 △주부산헝가리 명예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