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문화행간] 길광편우(吉光片羽)의 사연
길광편우(吉光片羽)는 수십년째 가방에 넣고 다니는 내 메모 공책에 붙인 이름이다. 30년 전 홍콩 침사추이의 지하상가에서 처음 이 이름과 만났다. 여성 장신구 편집매장의 상호였는데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다. 찾아보니 길광(吉光)은 아름다운 깃털을 지닌 상상 속의 새 또는 신수(神獸)의 이름이었다. 누구도 그 실체를 본 적이 없고 편우(片羽), 즉 한 조각 깃털로만 세상에 전해진다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남은 한 조각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해서 그 원래 모습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길광이란 새의 깃털처럼 내 머릿속에서 점차 커져서 언젠가 그 굉장한 실체와 마주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내 메모 공책에 이 이름을 붙였다. 새 공책을 시작하면서 이 네 글자를 쓸 때가 기분이 제일 좋았다. 아래에는 메모를 시작한 첫 날짜를 적어 두었고, 공책을 바꾸기 전 마지막 날짜를 적어놓곤 했다. 짧게는 3개월 또는 6개월마다 공책을 바꾸었는데, 그렇게 쌓인 메모 공책이 무릎 높이를 넘어섰다.
공책은 학술발표차 외국을 가거나 여행을 떠났을 때 그곳 기념품 숍에 들러서 그립감이 좋고 개성적인 것을 골라 사 모은 것들이다. 아직 안 쓴 공책이 쓴 것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동안 쓴 공책들을 날짜순으로 배열해서 책꽂이에 꽂자 한 칸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한번씩 들춰보면 내 공부의 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다산의 초서 편지 한 통을 붙여놓고 그 옆에 탈초한 내용을 적어 놓은 것도 있고, 논문에 대한 구상이 초기 목차 단계에서 몇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꼴을 갖춰 가는 과정도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쓴 새 책의 서문도 있다. 인쇄된 최종 원고와 비교해 보니 큰 차이가 없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흐름을 타면 글을 쓴 장소가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메모 속에는 벼락처럼 만난 접점의 순간들이 그대로 흔적으로 남았다. 어떤 면은 그 글을 쓸 때 앉아 있던 외국의 어느 길거리 카페의 풍경이나 지하철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난 삼아 써둔 시조도 보인다. "문제가 문제지만 문제는 아니거니, 문제는 문제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문제가 무언지 모르는 그것 진짜 문제라네." 아래쪽에 그 말장난의 가락으로 한 수를 더 써 놓았다. "그리고 그리다가 그려보니 더 그리워. 그림 속 그리움이 그리자 그려지네. 그려서 그리운 정을 그려두고 그리리."
"書有未曾經我讀, 事無不可對人言"이란 메모는 어느 전시장에서 적은 구절인 듯한데, 처음엔 의미가 잘 안 들어왔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번역을 몇 번 고쳐 "책은 일찍이 내가 읽지 못한 것이 있어도, 일은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로 써 놓았다.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던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잊었던 이 구절과 만나 내 삶의 태도를 문득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몇 권의 길광편우를 더 쓸 수 있을까.
정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