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가스배관 없는 아파트' 확대 앞두고… 제주서 냉난방·급탕 전기화 실증
신효아파트 실거주 12가구서 적용
태양광·히트펌프·축열로 냉난방·급탕
남는 전기 열로 저장해 계통 유연성 확보
정부 2027년 히트펌프 예산 859억 편성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주민이 실제 거주하는 제주 공공임대 아파트에서 보일러를 쓰지 않고 냉방과 난방, 온수를 모두 전기로 공급하는 실증이 시작된다. 정부가 내년 히트펌프 보급 예산을 올해보다 5.5배 늘리고 공동주택 실증까지 확대하기로 한 가운데 제주에서 먼저 실제 거주 아파트를 대상으로 전기화 모델을 시험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5일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도는 이날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제주개발공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LG전자와 '공동주택 냉난방 전기화 및 전력열전환(P2H) 실증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실증 대상은 서귀포시 효돈동 신효아파트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12가구 공공임대주택으로 제주개발공사가 운영한다.
신효아파트에는 가구별 2kW 태양광 발전설비와 공용부 5kW 태양광, 고효율 전기 인덕션, 스마트 에너지관리체계가 도입될 예정이다. 여기에 히트펌프를 연결해 각 가구의 냉방과 바닥난방을 전기로 전환하고 온수는 중앙 급탕 방식으로 공급한다.
제주도는 주민이 실제 거주하는 공동주택에서 냉난방과 급탕을 모두 히트펌프 기반으로 전기화하는 실증은 전국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핵심 기술은 P2H다. P2H는 전기를 열에너지로 바꿔 사용하는 전력열전환 기술이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이 많을 때 남는 전기를 히트펌프로 열로 전환한 뒤 축열장치에 저장하고 난방이나 온수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구조다.
배터리에 전기를 그대로 저장하는 방식과 달리 최종적으로 열이 필요한 난방·급탕 수요를 열 형태로 저장한다.
제주처럼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아 특정 시간대에 전기가 남는 지역에서는 건물 자체를 전력수급 조절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전력 생산이 많은 시간에 히트펌프를 가동해 열을 저장하고 전력수요가 몰리는 시간에는 가동을 줄이면 전력망의 부담을 낮추는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번 실증은 공동주택 전기화의 현실적인 장애물을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단독주택과 달리 아파트는 기계설비를 설치할 공간이 제한되고 여러 가구가 동시에 사용하는 온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제주 실증에서는 공용부에 대형 히트펌프와 고밀도 축열장치를 설치해 중앙에서 온수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공간 문제를 풀고 냉방과 바닥난방은 히트펌프로 통합한다.
정부 정책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해 발표한 히트펌프 보급 활성화 방안에서 2035년까지 히트펌프 350만대를 보급하고 온실가스 518만t을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2027년도 예산안에는 히트펌프 보급사업에 859억원이 반영됐다. 올해보다 447% 늘어난 규모다. 올해 단독주택 중심의 실증에서 내년에는 공동주택까지 범위를 넓혀 이른바 '가스배관 없는 아파트'를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아직 내년도 공동주택 실증 대상 지역과 단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개별 가구마다 히트펌프를 설치할지, 중앙에 대용량 설비를 두고 공급할지도 복수 방식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 신효아파트 실증은 정부의 공동주택 히트펌프 확대에 앞서 실제 거주환경에서 기술과 운영방식을 확인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제주도는 올해 단독주택 히트펌프 보급사업에서도 정부 예산 물량의 95%를 배정받았다고 밝혔다.
제주가 히트펌프 실증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수급 문제가 있다. 풍력과 태양광은 발전량을 필요할 때 임의로 늘리고 줄이기 어렵다. 발전량이 소비보다 많아지면 출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주택의 난방과 온수 수요를 전기로 바꾸고 사용시간까지 조정할 수 있다면 재생에너지 전력을 지역 안에서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수요처가 생긴다.
협약에 따라 제주도는 제도개선과 정책 연계를 맡는다. 제주개발공사는 신효아파트 시설 개선과 운영을 담당한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중앙 급탕 P2H 시스템 설계와 구축, 운영자료 분석을 맡고 LG전자는 히트펌프 설계와 제품 공급, 기술지원과 성능평가를 담당한다.
오세기 LG전자 부사장은 "공동주택은 공간 제약과 기존 설비체계 때문에 전기화가 쉽지 않았다"며 "이번 실증으로 한국형 공동주택 전기화 모델의 기틀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위성곤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단독주택에 이어 공동주택으로 혁신을 확대하는 전환점"이라며 "이번 실증을 위해 재정·제도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관건은 실제 입주민이 체감할 경제성과 전력망 효과다. 보일러를 없앤 공동주택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하려면 겨울철 난방과 온수 공급 안정성뿐 아니라 초기 설치비와 전기요금, 유지관리비까지 기존 난방방식과 비교해 경쟁력을 입증해야 한다.
제주 신효아파트 12가구에서 나오는 실제 운전자료가 정부의 '가스배관 없는 아파트' 구상을 전국 공동주택으로 확대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mail protected]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