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삶들을 밝혀주는 '희망의 빛' [이현희의 '아트톡']
정영주 '달동네 저녁 903'
글로벌 아트 마켓은 작가의 예술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 감성이 조화된 작품에 주목해오곤 했다.
밀집된 집들 사이에서 밝은 불빛을 보여주는 정영주의 작품도 그중 하나로, 젖은 한지를 구겨 형태를 갖추고 색 올리기를 반복하여 만들어진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색감을 입은 화면이 만들어내는 노스탤지어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과 함께 미래지향적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오래전 정영주는 인생의 모든 가치를 작품에 두었던 만큼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자 존재 가치마저 부정되는 느낌을 받았었다고 한다. 삶이 벽에 부딪힌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어느 날의 해 질 무렵, 생각을 떨치기 위해 남산을 찾았다 우연히 마주한 풍경에서 유대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은 뒤 그 풍경을 20년 가까이 담아오고 있다.
어깨를 맞댄 채 빼곡히 들어선 집들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좁은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담긴 풍경은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과 그리움이 겹쳐져 재창조된 따스한 공동체이다. 삶의 소란스러움을 걷어내고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이 풍경은 소박한 삶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떠올리게 하며, 위안의 말을 걸어와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 준다. 빛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서사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테마로 특히 빛과 어둠의 조화는 단순한 시각적 연출을 넘어서는 조형 언어이다. 어둠은 빛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한 토대가 되어주며, 그 안에서 피어난 빛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 조형 언어는 정영주의 화법에 담겨 시각적 몰입감과 정서적 교류를 이끌어낸다.
시간의 흐름에 밀려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노을의 붉은 빛을 대체하듯 저 멀리에 있는 집의 아스라한 불빛마저도 소중하게 포착하고 있는 '달동네 저녁 903'(2019)은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담아내면서도 좁은 골목길,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집들과 그 사이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 빛의 대비가 명상적으로 다가온다.
이현희 서울옥션 아카이브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