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美, 중동에 매몰된 사이… 中 '철의 실크로드' 동남아 삼켰다

김준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안보 족쇄 '말라카 딜레마' 탈피
말레이 'ECRL' 프로젝트 사활
태국 최초 고속철 건설도 따내
일대일로 종단 노선 허브로 확보
'산업 공생'이냐 '부채의 덫'이냐
전반기 철도 화물 운송량 42%↑
생산·공급망 묶인 무역관계로 진화
라오스·인니 등 인프라 부채 상당
물류 헤게모니 中에 예속 우려도

美, 중동에 매몰된 사이… 中 '철의 실크로드' 동남아 삼켰다

【파이낸셜뉴스 하노이(베트남)=김준석 특파원】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문제에 외교·군사적 역량을 집중하는 사이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철의 실크로드'를 구축하며 영향력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대형 인프라 투자를 앞세운 중국의 공세는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적 종속성을 심화시키며 미·중 간 새로운 전선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중국은 라오스와 태국, 말레이시아 등을 잇는 대규모 철도망 구축에 속도를 내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물류망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단순한 인프라 건설을 넘어 11개국 6억명의 인구를 아우르는 동남아 전역을 중국 중심의 거대 경제공동체로 재편하려는 구상이다. 철도 연계는 역내 교역과 중간재 중심의 공급망 통합으로 이어지며 중·아세안 관계를 강력한 '산업 공생 구조'로 묶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 각국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물류비 절감과 교역 활성화라는 가시적 수혜 이면에는 막대한 인프라 부채가 자리한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입김을 키우는 부메랑으로 작용하면서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말레이 철도로 '말라카 딜레마' 넘나

22일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라오스 철도와 자카르타-반둥 고속철에 이어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도 중국 주도의 철도 인프라 구축에 속도가 붙고 있다.

중국과 합작으로 추진 중인 말레이시아 동해안 철도(ECRL) 프로젝트는 현재 공정률이 95%를 넘어섰으며, 1단계 핵심 구간은 시운전 단계에 돌입했다. 안소니 록 교통부 장관은 지난달 14일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을 통해 2026년 12월 조기 개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말레이반도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총연장 665㎞ 노선은 티티왕사 산맥을 뚫어야 하는 최고 난도의 공사였다. 자체 기술력과 재정이 부족했던 말레이시아로서는 대규모 차관과 세계 최고 수준의 터널 굴착 기술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중국의 제안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대안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도 이 프로젝트는 사활이 걸린 사업이다. 수입 원유의 80% 이상이 미국 영향권인 말라카해협을 통과하는 이른바 '말라카 딜레마'를 안고 있는 중국은 싱가포르를 우회해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육로로 잇는 ECRL을 통해 안보적 취약성을 단숨에 해소할 수 있게 됐다.

■까다로운 태국 뚫은 중국

당초 지지부진했던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도 최근 속도가 붙고 있다. 중국-태국 고속철도는 태국 최초의 고속철도이자 중국의 표준궤와 시속 250㎞ 기술을 적용해 방콕에서 라오스 국경 농카이까지 609㎞를 잇는 메가 프로젝트다.

지난 2014년 양측의 논의는 시작됐지만 초기부터 자금 조달 방식을 놓고 양국 간 치열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주변국과 달리 중국 자본에 대한 예속을 강하게 경계한 태국 정부가 '토목 공사비는 100% 자체 예산과 국내 금융으로 조달하고, 중국은 기술과 열차 시스템만 공급한다'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금리 협상과 설계 변경으로 조율이 길어지며 2017년 말에야 첫 삽을 떴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과 까다로운 환경영향평가(EIA)까지 겹치면서 완공 목표가 거듭 수정됐다. 진통 끝에 지난 7월 2030년 1단계 정식 개통 목표가 확정됐다.

이처럼 까다로운 재정 조건 속에서도 중국이 사활을 건 이유는 태국이 동남아 일대일로 종단 노선의 허브이기 때문이다. 이미 완공된 중국-라오스 철도에 이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리적 중심축인 태국 노선이 반드시 연결돼야 한다.

중국 정부는 태국과 말레이시아 외에도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중국-라오스 철도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 베트남을 잇는 콜드체인(냉장·냉동 물류) 인프라를 한데 묶어 인도차이나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촘촘한 그물망을 완성하고 있다.

2021년 개통한 중국-라오스 철도는 라오스를 대중국 물류 통로로 바꿨고, 시속 350㎞의 자카르타-반둥 고속철은 자카르타~반둥 간 이동 시간을 45분으로 단축했다. 나아가 중국은 윈난성 쿤밍에서 베트남 하노이·하이퐁항을 잇는 콜드체인 전용 열차를 대폭 확대했다. 매년 수천억원 규모의 농산물을 부패로 잃던 베트남의 물류난 해결에도 나섰다.

■中 "아세안과 산업 공생 구조"

중국의 동남아 철도망 확장과 연계는 중·아세안 거시경제 지표와 교역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전반기 중·아세안 역내 철도 화물 운송량은 전년 동기 대비 42% 급증했다. 철도·해운·도로가 연동된 복합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양측 간 운송 비용도 평균 30% 이상 절감됐다.

이 같은 철도망 연결로 중·아세안 무역 규모가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2026년 1~7월 교역액은 7444억1000만달러(약 1008조5266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24.7% 증가하는 등 수치 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자오웨이화 푸단대 중국과 주변국 관계연구센터 주임 교수는 "중국과 아세안 교역에서 중간재 비중이 3분의 2를 넘어서면서 과거 단순히 최종 제품을 사고팔던 1차원 무역 관계는 완전히 사라졌다"면서 "양측 기업이 서로의 공급망 깊숙이 들어가 부품 생산, 조립, 기술 공유를 함께 진행하는 산업 공생 구조로 완전히 전환됐다"고 평가했다.

■'부채의 덫'과 중국 종속의 딜레마

화려한 수치 이면에는 막대한 인프라 부채가 동남아 국가들의 목줄을 죄는 부메랑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구 750만명의 내륙국 라오스는 중국-라오스 철도 건설비의 60%를 중국 차관으로 조달하면서 국가 채무가 GDP의 120%를 넘어섰다. 채무 불이행 위기에 직면한 라오스는 결국 핵심 인프라인 전력망 운영권을 중국 국유기업에 넘기는 수모를 겪었다.

인도네시아 역시 동남아 최초 고속철 개통의 환희 뒤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재정 부담을 주지 않겠다'던 중국의 공언과 달리 공사 지연으로 치솟은 비용을 인도네시아 정부가 고스란히 떠안으며 '부채의 덫'이 현실화됐다. 총사업비 72억7000만달러의 75% 이상을 대출로 충당한 탓에 매년 원리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사태가 악화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최근 중국과 긴급 채무 구조조정 협상에 돌입했다.

철도 표준의 차이는 기술 종속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은 기존 동남아의 협궤(1000㎜) 대신 중국 표준궤(1435㎜)를 적용했다. 이에 따라 기술과 부품, 유지보수 시스템 전반을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종국에는 역내 물류의 모든 헤게모니가 중국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리처드 맥그리거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중국 주도의 철도 프로젝트는 장기적으로 동남아 국가들의 재정 부채 구조를 중국에 종속시키는 구조적 리스크를 남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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