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서약 다음날 실명·벌금·견책 전달… 제주 감사위, 상임지휘자 징계 요구
징계위원 참여 뒤 총무·노조위원장에 전달
징계유예·당사자 소명 여부까지 설명
서귀포시 "복무관리 목적" 의견 제시
민간 위촉위원도 심의 중 비밀유지 의무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제주지역 한 도립예술단 상임지휘자가 징계위원으로 참여해 비밀유지 서약까지 한 뒤 하루 만에 징계 대상자의 실명과 사고 내용, 벌금형, 견책 결과 등을 권한 없는 사람들에게 전달한 사실이 감사에서 확인됐다. 제주도감사위원회는 공무원이 아닌 위촉위원도 개인의 신분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심의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직무상 비밀을 지켜야 한다며 해당 지휘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23일 제주도감사위원회에 따르면 서귀포시는 지난해 11월 5일 도립예술단 상임단원 C씨의 교통사고 관련 품위유지 의무 위반 사안을 심의하기 위해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상임지휘자 A씨는 징계위원으로 위촉돼 회의에 참석했고, 심의 과정에서 알게 된 징계 대상자의 개인정보와 징계 관련 내용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작성했다.
문제는 이튿날 발생했다. A씨는 11월 6일 합주가 끝난 뒤 한 시민문화체육복합센터 공연장 대기실에서 예술단 총무와 관악단 노조위원장을 만나 약 15분간 면담했다.
감사위 조사 결과 A씨는 전날 징계위원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처음에는 징계 대상자를 '모씨'라고 표현했다. 이후 노조위원장이 관련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자 징계 대상자의 이름과 사고 내용, 벌금형, 징계위원회가 의결한 견책 결과를 전달했다.
심의 과정에서 나온 내용도 설명했다. A씨는 감사위의 징계 요구가 최종 결정이 아니고 징계위원회 의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취지와 함께 징계유예를 통한 감경 가능성, 징계 대상자가 직접 출석해 적극적으로 소명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향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단원들이 징계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충분히 소명하도록 안내하는 과정에서도 징계 대상자의 실명을 언급했다.
A씨에게 설명을 들은 노조위원장은 징계유예 등에 관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징계위원에게 연락했다. 이 위원은 지난해 11월 12일 비밀유지 서약 위반 문제를 서귀포시에 제보했다.
서귀포시는 당사자와 관련자 등을 상대로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같은 해 12월 17일 감사위에 조사를 청구했다.
감사위는 A씨가 전달한 징계 대상자의 실명과 징계정보, 감경 가능성, 출석·소명 여부 등을 모두 직무상 알게 된 비공개 정보로 판단했다. 면담 상대인 총무와 노조위원장 역시 이런 정보를 제공받을 권한이나 직무상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징계위원회 회의와 위원 발언 등도 원칙적으로 비공개 대상이다. 지방공무원 징계 및 소청 규정은 징계 관련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이 아닌 위촉위원도 예외는 아니라는 게 감사위 판단이다. 도립예술단 징계위원회에는 예술감독과 안무자, 지휘자, 외부 전문가 등이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감사위는 징계 결과가 당사자의 신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민간 위촉위원도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공적 심의기능을 수행하는 지위에 있다고 봤다.
서귀포시는 다른 의견을 냈다. A씨가 징계 대상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목적으로 정보를 유출한 게 아니라 소속 단원 복무관리와 유사사례 예방을 위해 관련 내용을 일부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였다. 실명을 언급해 비밀유지 서약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징계 등 신분상 조치가 필요할 만큼 중대한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감사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밀유지 의무 위반 여부는 명예훼손 목적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징계위원회에서 직무상 알게 된 비공개 정보를 권한 없는 사람에게 전달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복무관리나 재발 방지 목적도 실명과 구체적인 심의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A씨 역시 정보 전달 사실은 인정하면서 피해를 주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감사위는 이런 사정이 징계 수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고려될 여지는 있지만 비밀누설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판단했다.
감사위는 A씨가 비공개 징계 심의 내용임을 충분히 알고도 이를 전달했고, 실제 노조위원장이 다른 징계위원에게 사실관계를 재확인하는 상황까지 발생해 징계위원회 운영의 비밀성과 독립성, 향후 절차의 공정성과 신뢰를 훼손할 우려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감사위는 A씨의 행위가 지방공무원 징계 및 소청 규정상 비밀누설 금지 의무와 제주도립예술단 운영 규정을 위반한 징계사유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리고 서귀포시장에게 징계 처분을 요구했다.
도립예술단 운영 규정상 단원 징계는 견책·감봉·출연정지·해촉으로 구분된다. 감사위는 이번 처분요구에서 구체적인 징계 수위는 특정하지 않았다.
이번 감사 결과는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각종 위원회의 정보관리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인사·징계처럼 개인의 권리와 신분에 영향을 미치는 심의에 참여했다면 공무원인지 민간 위촉위원인지와 관계없이 회의 과정에서 취득한 비공개 정보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한 사례다.
[email protected]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