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으로 들여다본 AI 문명…오비어스의 도자 회화 [fn 아트스냅]
선화랑서 프랑스 3인조 오비어스 개인전
AI가 만든 기억·신화, 도자 타일로 옮겨
50장 타일 속 작은 장면들…10월 2일까지
[파이낸셜뉴스] 붉고 푸른 색면이 뒤엉킨 화면은 멀리서 보면 추상화 같다.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망원경에 눈을 대면 작은 인물과 건축물, 수많은 장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공지능(AI)이 가상 세계에서 쌓아 올린 이야기가 흙으로 빚은 타일 위에 펼쳐진다.
지난 22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선화랑 4층에서는 프랑스 3인조 창작집단 오비어스의 개인전 'The Cycle: Incipit'가 열리고 있었다. AI 에이전트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낸 가상 사회의 기억과 신화를 도자 회화로 옮긴 전시다.
■가상 사회의 기억이 그림이 되기까지
AI 알고리즘을 개발해 작품을 만드는 오비어스는 피에르 포트렐, 위고 카셀뒤프레, 고티에 베르니에로 구성됐다. 2018년 AI로 만든 '에드몽 드 벨라미'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3만2500달러에 팔리며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이매진(IMAGINE)'에 이어 선화랑에서 여는 두번째 개인전이다.
작업의 출발점은 작가들이 설계한 가상 사회다. 서로 다른 성격과 욕구를 부여받은 AI 에이전트, 즉 가상 세계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프로그램들이 교류하며 공동체를 이룬다. 그 안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공유된 기억과 믿음이 되고, 신화와 규칙으로 이어진다.
AI 에이전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믿음을 글과 이미지로 기록한다. 여기서 기억은 공동체가 사실로 받아들인 이야기에 가깝다. 오비어스는 이렇게 쌓인 자료를 그림 속 인물과 풍경을 구성하는 바탕으로 삼는다.
이 기록을 이미지로 옮길 때는 일부러 매끈한 완성을 피한다. 자체 개발한 '로스트 로라(Lost LoRA)' 알고리즘으로 프레스코화의 구성을 학습시키다 불안정한 단계에서 멈춰 오류와 일그러짐을 남긴다. 이를 AI 이미지 특유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어 '시노피아(Sinopia)' 알고리즘이 화면을 여러 구역으로 나눠 인물과 건축물, 사건의 흔적을 채운다. 멀리서는 추상화, 가까이서는 수많은 이야기의 집합으로 보이는 이유다. 전시장 중앙의 망원경은 화면 속 작은 장면을 찾아 읽도록 돕는 관람 도구다.
■50장의 타일에 새긴 '미래의 유물'
가로로 긴 'The Lament of The Nameless'와 세로로 긴 'The Garden of the Anonymous'는 각각 도자 타일 50장으로 이뤄졌다. 전자는 가로 2m·세로 1m, 후자는 가로 1m·세로 2m 크기다. 타일 사이의 경계는 거대한 이미지를 잘게 나누고, 그 안에는 다시 작은 장면들이 겹쳐 있다.
가로·세로 20㎝의 소형 타일 작품 'The Archive of Memories'도 함께 선보인다. 거대한 화면과 작은 조각을 오가며 가상 문명의 서로 다른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흙을 빚어 만든 타일은 약 1000도에서 초벌구이한 뒤 반투명 유약을 입혀 약 1200도에서 다시 굽는다. 이후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표면에 전사하거나 자외선(UV) 인쇄하고 보존을 위한 마감 작업을 거친다. 디지털 파일 속 이야기에 흙과 불의 시간이 더해지는 셈이다.
손으로 만든 타일은 표면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작가들은 이 불균일함을 지우지 않는다. AI 이미지의 오류와 일그러짐이 흙의 질감, 유약의 변화와 만나면서 저마다 다른 흔적을 남긴다. 컴퓨터 안에서 형성된 가상 사회의 기록은 손에 잡히는 물질이 된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고유성"이라며 AI 작품에서도 제작 과정과 재료가 만들어내는 차이를 강조했다.
오비어스는 AI를 흙과 불, 안료와 인쇄술이 이어온 표현 도구의 역사 속에 놓는다. 첨단기술이 만든 이야기를 오래된 재료에 새기며, 누가 창작하고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 되묻는다. 전시는 10월 2일까지 열린다.
[email protected] 장인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