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국/중남미

"엄마, 나 죽기 싫어요"…76년째 귓가에 남은 그 외침<1950 산 자들의 기억⑥>

이병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16세에 두 번의 피란 겪은 하세종 참전용사 17세 미군 통역으로 문산 야전병원 배치 피투성이 미군 병사, 어머니 찾다 끝내 숨져 "전쟁 끝났지만 기억 속 전쟁은 끝나지 않아"

하세종 한국전 참전 용사가 지난 17일 미귝 뉴저지 플러싱에서 기자를 만나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이병철특파원
하세종 한국전 참전 용사가 지난 17일 미귝 뉴저지 플러싱에서 기자를 만나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이병철특파원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엄마, 나 죽기 싫어요. 살려주세요."

76년이 지났지만 하세종씨의 기억 속에는 아직 그 목소리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문산 인근 야전병원. 피투성이가 된 젊은 미군 병사가 실려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이 병사는 의사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를 찾는 거예요. '나 죽기 싫다. 살려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피투성이니까…. 그러다가 조용해졌어요. 죽은 거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하씨도 열일곱 살에 불과했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미군 부대에서 통역과 번역을 맡았던 소년이었다. 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오갔고, 야전병원에서는 자신과 나이가 크게 다르지 않은 젊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 17일 만난 하씨는 2시간에 걸쳐 76년 전 기억을 꺼냈다.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던 순간부터 두 차례 피란, 북한군의 학생 소집, 1·4후퇴, 부산 생활, 카투사 통역과 야전병원까지 그의 기억은 구체적이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역사책 속 사건이 아니다. 새벽 서울 골목을 뒤흔들던 탱크 소리이고 기관총탄에 산산조각 난 유리창이며, 학교 뒤 아카시아 나무 사이에서 지켜본 친구들을 태운 트럭이다. 그리고 야전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찾던 젊은 병사의 목소리다.

새벽 4시 들려온 탱크 소리…피투성이 된 가족

1950년 6월 말 새벽 4시께 서울 명륜동 집에서 잠을 자던 열여섯 살 하세종은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오토바이와 탱크 소리가 골목을 뒤흔들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방송에서는 국군이 북한군을 막아내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피란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취지의 방송도 이어졌고 가족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심하고 있었죠."

그러나 새벽에 들려온 소리는 달랐다. 하씨의 할아버지가 덧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그냥 기관총으로 갈기잖아요." 총알과 파편이 집 안으로 쏟아졌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다쳤고 하씨 역시 상처를 입었다. 할머니도 이마 쪽을 크게 다쳤다.

"그냥 피투성이가 됐어요. 난리가 난 거죠."

할아버지는 가족에게 "이러다가 여기서 다 죽는다. 너희라도 도망가라"고 했다. 하씨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집에 남았고 어머니와 하씨, 한 살 터울 여동생 세 사람이 피란길에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세종 참전용사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간직해온 국민훈장 수여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하세종 참전용사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간직해온 국민훈장 수여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와 동생을 태워야 한다"…16세 소년이 나선 한강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하씨 가족은 낙산 일대를 지나 뚝섬 방향으로 걸었다. 군인과 피란민 수백명이 뒤섞여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씨는 당시 상황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밟혀 죽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뚝섬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렸다. 먹을 것도 없었다. 길가 밭에서 양배추 같은 채소를 뜯어 먹고 덜 익은 토마토도 땄다. "먹어보니까 입이 딱 붙어요. 너무 떫어서." 하지만 배고픔을 가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겨우 한강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모래밭에는 먼저 도착한 피란민들이 몰려 있었고 강가에는 뗏목 몇 척이 있었다.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새끼줄을 몸에 묶고 앞에서 헤엄치며 뗏목을 끌고,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밀었다.

열여섯 살 하씨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줄을 매고 헤엄치면 우리 엄마하고 동생을 뗏목에 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죠." 어른들은 어린 학생이라며 말렸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하씨와 어머니, 여동생은 모두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지금의 삼성동·봉은사 일대였다. 당시에는 야산이 많던 곳이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이 이미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내려가도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건넌 한강을 다시 건너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로 나오라는 지시…밖에는 트럭 대여섯 대

서울로 돌아왔다고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한 뒤 하씨는 몸을 숨기고 지냈다. 그러던 7월 초 트럭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학교로 나오라고 알렸다. 보성학교에 다니던 하씨도 학교로 향했다.

강당에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년별로 줄을 세웠다. 중학교 3학년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고등학생들은 남겼다. 당시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경계에 있던 하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학생들을 관리하던 선배들이 몸에 표식을 달고 있는 것을 본 하씨는 옆에 있던 학생에게 표식 하나를 구해 달았다. 친구 한 명과 함께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담당 교사가 하씨를 보고 의심하는 듯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학교 밖으로 나오자 트럭 대여섯 대가 서 있었다. 하씨와 친구는 그대로 달아나지 않고 학교 뒤편 아카시아 나무가 우거진 곳에 몸을 숨겼다. 잠시 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서 있던 강당에서 고등학생들이 줄지어 나왔다.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은 전부 태워서 가더라고요."

학생들은 트럭에 올라탔고 트럭은 사라졌다. 하씨는 당시 함께 학교에 다니던 학생 가운데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그 줄에 서 있었다.

하씨는 이후 약 석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나 계속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었다. 동네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 했고 응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하씨는 북한군 점령 아래 서울에서 벌어진 '인민재판'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다만 당시 구체적으로 무엇을 봤는지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며 말을 아꼈다. 그 시절을 설명하는 그의 말은 짧았다. "석 달 동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서울은 다시 수복됐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군 참전 이후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1950년 12월 말 하씨 가족은 또 서울을 떠났다. 두 번째 피란이었다. 이번에는 여름이 아니라 한겨울이었다.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향한 가족은 피란민의 이삿짐 등을 실은 트럭을 얻어 탔다. 그러나 추풍령에 도착하자 눈과 추위 때문에 트럭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엄청나게 추웠어요. 트럭이 못 가니까 다 내려서 걸었죠."

짐을 실은 트럭과 함께 고개를 넘은 가족은 대구에 도착했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몇 달 전 서울에서 뚝섬까지 걸었던 소년은 이번에는 한겨울 추풍령을 넘어 한반도 남쪽 끝까지 내려왔다.

영어시험 한번으로 달라진 17세 소년의 전쟁

부산에는 피란 온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있었다. 하씨도 학교를 찾아가 등록했다. 학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했다. 전쟁 중 젊은 남성에게 학생 신분증은 단순한 학교 증명서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등록 과정에서 한 사람이 하씨에게 영어를 얼마나 배웠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몇 년 배운 것이 전부라고 하자 영어시험을 보라고 했다. 시험을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미군 부대에서 통역과 번역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하씨는 당시 카투사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가투사가 뭡니까' 그랬어요." 보성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사무실에서 번역 업무를 했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미군 부대로 가 번역을 하고 미군을 따라다니며 통역했다.

부산으로 미군과 유엔군 병력이 계속 들어오면서 하씨는 수송 관련 업무에도 배치됐다. 어느 나라 군인이 몇 명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이들을 어느 부대로 보내야 하는지를 통역했다. 관련 서류를 처리하고 서명을 받는 일도 했다. 부산에 도착한 병사들은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했다.

민간인 구호물자 배급 현장에서도 통역했다. 한쪽에서는 외국에서 온 젊은 병사들이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떠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집과 먹을 것을 잃은 피란민들이 미군이 나눠주는 구호물자를 기다렸다. 열일곱 살 하씨는 군인과 민간인 사이를 오가며 전쟁의 두 얼굴을 모두 봤다.

문산 야전병원…"단어 하나밖에 안 들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미군 장교가 하씨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문산 인근의 야전병원이었다. 그곳에서도 통역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막상 의사가 입을 열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의사가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두꺼운 사전을 들고 다녔지만 의사가 한 문장을 길게 말하면 그 가운데 아는 단어 하나 정도만 귀에 들어왔다. 그 단어를 붙잡고 전체 뜻을 짐작했다.

부상병의 말을 의사에게 전하고 의사의 말을 다시 부상병에게 전달해야 했다. 하씨는 "처음에는 엉터리 영어를 한 거죠. 이 사람 아프다, 죽겠다, 그런 건 아니까"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통역하면서 조금씩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야전병원에서 영어보다 먼저 배운 것이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가였다. 병원에는 부상병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부상병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날도 한 젊은 미군 병사가 실려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병사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의사가 아닌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 나 죽기 싫어요. 살려주세요."

하씨는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요. 피투성이니까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죽었어요." 그 순간 하씨는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몸이 얼음장같이 되는 거예요. 내가 언제 나도 이렇게 죽을지 모르잖아요."

하씨는 전투병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터를 이동하며 죽은 사람들을 봤고 포탄에 맞은 차량과 병사들도 목격했다. 주변에서는 포탄이 날아다녔다. 그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지는 않아도 포탄이 날아다니잖아요"라고 했다.

총성 멈춰도 끝나지 않은 전쟁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하씨의 일은 바로 끝나지 않았다. 미군 병력과 장비를 정리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하씨는 그해 10월께까지 통역 관련 업무를 계속했다고 기억했다. 약 2년 반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벗어났지만 전쟁의 기억에서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국에 건너간 뒤 친구와 함께 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길질을 한 적도 있었다. 한동안 사라지는 듯했던 악몽은 1989년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되살아났다고 했다.

"그게 한 20년을 가더라고요."

하씨는 자신이 전투병으로 총을 쏘거나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족이 총격을 당하는 것을 봤고 친구들이 트럭에 실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두 번의 피란을 겪었고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다녔다. 야전병원에서는 자신과 나이가 크게 다르지 않은 병사가 눈앞에서 어머니를 찾다 숨졌다.

전쟁은 이후 하씨의 인생 방향까지 바꿨다. 함께 근무했던 미군 장교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의 산을 보며 미국에 가서 공부한 뒤 돌아와 나무를 심어보라고 권했다. 그 말이 계기가 돼 하씨는 전쟁 이후 대학에 진학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생활도 쉽지는 않았다.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 학비를 마련했고 돈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학교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음식을 찾아 먹기도 했다. 어느 비 오는 밤 이를 발견한 학교 경찰은 그를 처벌하는 대신 중국 음식을 사주고 학교 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씨는 이후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76년이 지난 지금 하씨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미국에서의 성공도, 이후의 삶도 아니다. 1950년과 1951년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던 장면들이다.

새벽 서울 골목을 뒤흔들던 탱크 소리, 기관총탄에 산산조각 난 유리창, 피투성이가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여동생을 건너게 하려고 자신이 뗏목을 끌겠다고 나섰던 한강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카시아 나무 뒤에서 지켜본 학생들을 실은 트럭과 한겨울 걸어서 넘었던 추풍령도 있다.

그리고 문산 야전병원에서 죽어가던 젊은 미군 병사가 마지막 순간 외쳤던 한마디가 있다.

"엄마, 나 죽기 싫어요."

1953년 전쟁은 멈췄다. 그러나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하세종씨의 기억 속 전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어머니 #아버지 #하세종씨 #피란길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