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명품 배달인 줄"…8억 나른 50대 보이스피싱 수거책의 최후 [사기꾼들]

이동혁 기자
파이낸셜뉴스

비대면 명품 구매대행업체 직원 취업
서울·수원·대구·부산·광주 전국 누벼
18차례 걸쳐 현금·수표 8억여원 수거
"범죄인 줄 몰랐다" 주장했지만 불인정
"비상식적 현금 전달 반복"…징역 3년6월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

[파이낸셜뉴스] "명품 구매대행업체에 취업한 줄 알았다."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 50대 A씨에게 어느 날 '명품 구매대행업체 팀장'이라는 사람의 연락이 왔다. 고객이 구매한 상품을 교환·반품하고 판매금을 받아오는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실제 맡은 일은 전국을 돌며 거액의 현금을 받아 나르는 일이었다. A씨는 서울부터 수원·대구·부산·광주까지 전국을 오가며 처음 보는 사람들로부터 수천만원에서 1억원이 넘는 현금을 건네받았다. 한 달여 동안 18차례에 걸쳐 수거한 현금과 수표만 8억6050만원에 달했다.

법원은 A씨가 처음부터 보이스피싱 조직의 실체와 범행 구조를 모두 알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사업자등록증조차 확인하지 않은 업체의 지시를 받아 거액의 현금을 반복적으로 수거·전달한 정황 등을 근거로 자신의 행위가 범죄일 가능성은 인식했다고 판단했다.

구직사이트 노린 보이스피싱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결된 것은 지난해 5월이었다.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 A씨는 한 해외 직구 온라인 쇼핑몰의 '이지아 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등본, 이력서까지 제출했으나 회사 관계자를 직접 만나거나 면접을 본 적은 없었다.

처음 안내받은 업무는 상품을 교환·반품하거나 판매금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업무는 곧 '현금 수거'로 바뀌었다. A씨는 지난해 6~7월 전국을 돌며 거액의 현금을 받아 조직원에게 전달했다. 돈을 건넨 사람에게 납품증이나 영수증을 발급하는 절차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그사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각본에 속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카드 배송원으로 접근한 뒤 금융감독원 직원이나 검찰 수사관 등을 사칭해 "명의가 도용됐다", "통장이 범죄에 사용됐다"고 속였다. 자산을 보호하려면 현금을 직원에게 전달해야 한다며 피해자들을 현금 인출로 유도했다. 현장에 나가 돈을 받아 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A씨가 맡았다.

한 피해자는 서울 광진구에서 A씨에게 현금 6100만원을 건넸다. 서울 서초구에서는 또 다른 피해자가 이틀에 걸쳐 1억200만원을 전달했다. 광주에서는 우체국 집배원과 카드사 직원, 검찰 등을 사칭한 조직원들에게 속은 피해자가 두 차례에 걸쳐 2억원을 건넸다. A씨는 돈을 받은 뒤 광명으로 이동해 성명불상의 남성에게 전달했다.

法 "범죄 가능성 인식했을 것"
A씨는 재판에서 자신 역시 조직에 속았다고 주장했다. 명품 구매대행업체에 정상적으로 취업한 것으로 알았을 뿐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한다는 사실은 몰랐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체 구조를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현금 수거·전달 행위가 범죄일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용인했다면 범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비정상적인 업무 방식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A씨는 피해자의 이름이나 연락처조차 모른 채 조직으로부터 인상착의만 전달받아 현장에서 사람을 찾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김정민 과장', '김성환 팀장', '김미영 차장' 등이 보냈다고 말하며 돈을 건네받기도 했다.

수거한 돈의 액수를 현장에서 확인하지 않은 채 피해자와 헤어진 뒤 현금을 세거나 쇼핑백을 촬영해 지시자에게 보내기도 했다. 한 달여 동안 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 받은 수당은 500만~600만원에 달했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형사부는 전기통신금융사기피해방지및피해금환급에관한특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판결은 지난 11일 선고됐다.

재판부는 A씨가 50대 중반으로 전자회사 개발연구원과 기업 이사 등으로 장기간 근무해 상당한 사회 경험을 갖춘 점도 짚었다. A씨가 수사 과정에서 합법적인 일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이 어려워 일을 계속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 역시 범죄 가능성을 인식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했다.

다만 전체 범행을 계획하거나 지휘하지 않고 상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점은 양형에 함께 반영됐다. 피해금 가운데 6200만원이 압수돼 피해자에게 반환된 점과 A씨에게 동종 범죄나 벌금형을 넘는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됐다.

[email protected] 이동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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