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광장] '실용외교'가 국익에 도움 될까
구한말 조선도 나름대로 균형외교
강제병합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북중러 3국 군사훈련 본격화 예상
핵무장한 北을 어떻게 상대하나
지정학적 균열, 강대국 각축시대
'국익 중심 실용외교'가 가능한가
우리는 잊고 살지만 한반도는 얼마 전까지 세계의 화약고였다. 한반도를 노린 것은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었다. 러일전쟁과 한국전쟁은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신흥강대국 러시아의 등장에 의해 촉발되었다.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이었지만, 사실은 러시아 남하를 100년에 걸쳐 막아온 해양세력의 패권국 영국의 존재가 일본 승리를 결정지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을 둘러싼 100년 전쟁 그레이트게임이었다. 그리고 일본을 패퇴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남부를 얻고자 하는 스탈린의 작품이었고, 영국을 이은 패권국 미국이 개입해 이를 저지했다. 이후 냉전이 종결될 때까지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자 첨예한 격전장이었다.
승전국 미국에 의해 수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가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지역의 균형(equilibrium)이 형성되었다.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국제질서였고, 우리는 미국과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인해 한국은 외세의 간섭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며 세계적 무역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안전과 평화를 가져온 대외 전략환경에 있어서 퍼펙트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이것을 만든 주인공 미국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규범 기반의 국제질서 대신 '거래적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를 우선시하여 동맹을 중시하지 않는다.
특히 한정된 국방·재정 자원을 무분별한 세계 경찰 역할에 쓰기보다는 외교안보상의 우선순위를 본토 안전과 직접 결부된 아메리카대륙의 확고한 지배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 네트워크를 강화하기보다 한국·일본 등 동맹국 역할과 부담의 강화를 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우리 안전을 지키는 자애로운 후원자가 아니라 자국 이익만을 추구하는 거래 중심의 행위자로 변하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붕괴와 함께 지정학적 균열도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신흥대국이 등장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각축의 그레이트게임이 부활하려 한다.
중국은 정치·경제·군사·첨단기술 등 모든 면에서 패권국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은 유라시아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지배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중국 제조업은 선진국 평균의 제조업 수준을 뛰어넘었다.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그린에너지 등 첨단분야에 있어서 맹렬히 미국을 추격 중이다.
냉전 이후 힘을 잃고 있던 러시아도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부활시키면서 한반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가 줄어드는 가운데, 중러의 전략폭격기 편대와 함대가 한반도 주변 해공역에서 다니는 것은 이제 상시적인 일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이 57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지적했듯이 북한 핵무장은 이미 현실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 5위의 군사대국 한국은 핵무장한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러북 군사동맹 부활과 함께 북중 군사교류도 재개됨으로써 조만간 북한군도 참여한 북중러 3국 군사훈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이나 이란전쟁은 강 건너 불이 아니고 점점 그 화마가 우리 주변으로 전이될 수 있다. 한반도가 다시 그레이트게임의 화약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것을 지혜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냉전 이후 역대 정권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균형외교를 표방했다.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는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표방했다. 말이 실용이지 균형외교의 다른 표현이다. 냉전 종결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했고, 중국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동참한 상황이었기에 일정 부분 균형외교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균열의 강대국 각축 시대에 과연 균형외교가 가능할까. 구한말 조선도 나름대로 균형외교를 했다. 일본과 협약을 맺는 동시에 러시아와는 밀약을 맺었고, 다른 열강에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열강들은 그러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 강제병합 과정에서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균형외교의 실체이고, 우리가 처한 최악의 지정학적 환경의 실체다. 과연 우리가 실용외교와 국내정치에 매몰되어 있을 정도로 한가할 수 있을까.
윤덕민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前 주일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