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외국인 입장료 포기한 대영박물관… '19년 만의 유료화' 앞둔 한국에 던지는 화두 [박지현의 아트월드]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영국 대영박물관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파이낸셜뉴스] 1759년 개관 이래 무료입장 원칙을 지켜온 영국 대영박물관이 최근 불거진 외국인 관광객 유료화 계획을 공식 철회하고 보편적 개방성을 영구히 유지하기로 했다. 전 세계 주요 관광지와 문화 시설들이 앞다투어 요금을 인상하고 이중가격제(Dual Pricing)를 도입하며 수익성 확보에 열을 올리는 흐름 속에서 내린 파격적 결정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척점에서, 한국은 2008년 이후 전면 무료였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료화 전환을 공식 검토하고 있으며, 21년째 요지부동인 고궁 관람료 개편안 발표를 앞두고 있다. 글로벌 문화 예술계가 직면한 '재정 건전성'과 '보편적 공공성'의 딜레마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이다.

■ "박물관은 세상을 밝히는 곳"… 유료화 백지화 택한 영국

리사 낸디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 장관이 지난 9월 30일(현지 시간) 영국 리버풀 아레나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리사 낸디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 장관이 지난 9월 30일(현지 시간) 영국 리버풀 아레나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DCMS) 리사 낸디 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인플레이션과 재정난 속에서도 국립 박물관의 외국인 관광객 유료화 검토를 백지화하며 "우리의 박물관은 세상을 밝히는 곳이며, 누구에게나 영원히 무료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당초 영국 내에서는 삭감된 정부 지원금과 악화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인에게 20파운드(약 3만4000원) 수준의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유료화 도입 시 내국인 무료입장을 위해 신분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행정적 번거로움이 자국민의 발길마저 돌리게 하고, 국가 관광 산업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실용적 판단을 내렸다. 즉각적인 입장 수입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성이 창출하는 장기적 경제·문화적 파급효과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 "비싸다"는 내국인, "싸다"는 외국인… 요금 인상의 역설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나고야성. /사진=일본정부관광국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나고야성. /사진=일본정부관광국

영국 정부의 우려는 전 세계에 확산 중인 '관람료 인상' 트렌드 속에서 정확히 현실화하고 있다. 유지보수 비용 급증을 이유로 당장 지난 1일부터 대표 관광지인 나고야성의 성인 관람료를 기존 500엔에서 1000엔으로 2배 전격 인상한 일본이 대표적이다. 2일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요금이 인상되자 외국인 관광객들은 "1000엔을 내더라도 볼 가치가 있다"라며 수용한 반면, 일본 내국인 관람객들은 "천수각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너무 비싸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는 시설 유지비를 입장료 인상으로 충당하려 할 때, 자국민의 문화 향유권이 가장 먼저 위협받는 역설을 보여준다. 앞서 비거주 외국인에게 내국인의 2.5배 요금을 부과하는 '이중가격제'를 도입했던 일본 히메지성은 최근 기록적인 엔저와 오버투어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입장료를 최대 4배까지 더 높이는 방안마저 추진 중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등 유럽 주요 관람 시설들도 유지보수 비용 급증을 감당하기 위해 관람료를 대폭 인상하고 있다.

각국 문화 시설들이 관람객의 반발을 무릅쓰고 요금 인상에 나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제 학술지 '뮤지엄 매니지먼트 앤드 큐레이터십'에 라라 코로나 이탈리아 로사스 박물관장 겸 스페인 카탈루냐 국제대학교 박사가 지난해 게재한 '무료의 실제 대가: 핀란드 박물관의 관행과 정책' 논문에 따르면, 핀란드 미술관들의 재정 구조 분석 결과 무상 개방 정책이 기관의 정부 보조금 의존도를 높여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체 수익 모델이 없는 기관은 외부 예산 삭감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커피 한 잔 값'에 갇힌 한국 고궁, 기로에 선 국립 시설

정부가 올해 외국인 관광객 23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한 가운데 8월까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8월 방한 외국인 관광객이 1504만843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6% 증가했다고 9월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정부가 올해 외국인 관광객 23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한 가운데 8월까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8월 방한 외국인 관광객이 1504만843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6% 증가했다고 9월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이러한 딜레마는 11월 새 관람료 개편안 발표를 앞둔 한국의 현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지난해 서울 4대 고궁 관람객은 역대 최다인 1420만 명을 돌파했지만, 21년째 묶여 있는 요금 체계 탓에 재정 구조는 오히려 악화됐다. 경복궁 성인 관람료(3000원)는 시중 빅맥 단품(5700원) 가격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며, 전체 관람객의 70%에 달하는 무료 관람객으로 인해 인파가 몰릴수록 관리 비용만 늘어나는 실정이다. 연간 650만 명이 찾는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2008년 무료화 이후 19년째 유지해 온 상설전시 무료 운영 방침을 접고 유료화 검토에 들어갔다.

북적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연합뉴스
북적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연합뉴스

다만 인상 폭이나 한복 착용자 무료 유지 등 얽혀 있는 감면 체계를 두고 이견이 팽팽해 실제 시행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나고야성 관람객들의 상반된 반응에서 보듯, 섣부른 요금 현실화는 자국민의 진입 장벽만 높일 수 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보편적 가치'를 선택한 영국의 뚝심과, 20년 넘게 방치된 초저가 구조로 재정난을 겪는 한국의 현실은 공공 문화 자산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묻는다. 우리가 마주한 유료화 논쟁은 단순한 요금 인상을 넘어, 공공 문화 자산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email protected]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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