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들어야 하는 한국어, 주어 생략에 애먹지만...'장카설' 줄임말 재밌어요" [동남아 돋보기]
<9> 한글날 시리즈 마지막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 젊은층 AI 공습에도 한국어 '열공'
"한국어, 끝까지 들어야 해 매력적...주어 생략에 어려움 겪기도"
각국 한국어 교육자들 "한국어에 플러스 알파 능력 갖춰야"
다른 학문과의 융합, 연계 등 고심
"교환학생 제도의 문턱 및 한국인 교수 지원은 아쉬워" 한목소리
【하노이(베트남)·자카르타(인도네시아)·뉴델리(인도)=김준석 특파원·아울리아 마울리다 함다니 통신원·프라갸 아와사티 통신원】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결론을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상대방을 끝까지 존중해야 하는 언어인 것 같아요. 어렵긴 해도 그만큼 재미있어요."
지난달 29일 본지가 찾은 인도네시아 최고 명문대학인 인도네시아국립대(우이대·UI)의 교실에서 만난 한국학과 2학년 피라씨는 '한국어 말하기' 수업을 마친 뒤 이같이 말했습니다. 피라씨는 "인도네시아어가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로 문장을 만드는 데 비해 한국어는 동사가 맨 뒤에 온다"며 "앞에서 어떤 단어가 나왔는지를 알아들었더라도 마지막 말이 나오기 전까지 정확한 의미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같은 수업을 들은 2학년 알씨는 한국어의 또 다른 어려움으로 '주어'를 꼽았습니다. 알씨는 "한국어는 '눈치'로 먹고사는 언어 같다"며 "인도네시아어와 달리 한국어는 주어가 자주 생략되다 보니 처음에는 '도대체 누가 이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라며 범인을 찾는 심정이었다"고 웃었습니다.
알씨는 이어 "한국어는 새로운 표현이 빠르게 생겨나고, 말을 짧게 줄여 쓰는 문화도 무척 강한 것 같다"며 인도네시아어 과정의 한국인 학생에게 배운 '장·카·설'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한국 걸그룹을 대표하는 장원영, 카리나, 설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한국어는 정말 매력적이고 재밌다"고 말했습니다.
같은날 인도 뉴델리에서 만난 자와할랄 네루대(JNU) 한국학과 3학년 아스나씨는 "22개의 공용어와 1600여개의 방언이 있는 인도에서 한국어의 낯선 음소들은 진입장벽"이라면서 "된소리, 예사소리 등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정확하게 구별하고 발음하는 과정이 아직도 힘들다"고도 했다.
베트남 하노이 탕롱대에서 만난 한국어과 4학년 응우옌 응옥 린씨는 높임말과 호칭어를 어려운 부분으로 꼽았습니다.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에서는 한국어가 대학 전공을 넘어 정규 교육 과정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2021년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승인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정규 교육이 가능하도록 한 데 이어 고등학교 졸업시험 과목에도 포함했다. 올해부터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3급 이상 취득 시 외국어 시험을 면제하고 점수를 환산해 반영하는 제도도 시행 중입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제도입니다.
지난달 기자가 찾은 베트남 박닌영재고에서는 2024년 신설된 10·11학년 한국어반의 경쟁률이 5대 1을 웃돌았습니다. 학생들은 주 6시간 한국어를 배우며 원어민과 베트남인 교원이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천강희 하노이한국교육원 파견 교원은 "K콘텐츠를 넘어 한국 유학이나 심층 학습을 목적으로 반을 선택한 학생들이 많은 만큼 더욱 책임감을 갖고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현동 하노이한국교육원장은 "현재 169개교에서 3만3000여명이 정규 교육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유학·취업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 베트남을 이끌어갈 핵심 인재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인도에서도 한국어 열기는 뜨겁습니다. TOPIK 접수가 5분 만에 마감될 정도입니다. 2020년 나렌드라 모디 정부의 국가교육정책(NEP)을 계기로 한국어가 제2외국어 권장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현재 전국 24개 초·중등학교에서 조기 교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학과가 설치된 자와할랄 네루대의 경우 경쟁률이 3300대 1을 웃도는 등 경쟁이 치열합니다.
인도네시아 역시 지난 6월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외국어 교육을 전면 의무화한 가운데 한국어가 주요 교육 대상 8대 언어에 공식 채택됐습니다. 인도네시아국립대(UI)와 가자마다대(UGM) 등 4개 대학에 설치된 한국어과의 평균 경쟁률은 40대 1에 육박할 정도라고 합니다.
본지가 만난 학생들과 교육자들은 인공지능(AI) 통·번역이 보편화된 시대임에도 기계가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문화적 맥락과 관계적 의미 때문에 한국어 학습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알씨는 "한국어에는 비슷한 단어라도 특정 상황에 따라 쓸 수 없는 표현이 많은데 AI가 그런 미묘한 차이까지 완벽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면서 "통역은 단순히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게 아니라 말하는 이의 감정과 의도까지 전달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AI가 보편화될수록 한국어를 넘어 한국 자체를 이해하는 교육도 중요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의스 술라스트리 우이대 한국학과장은 "한국 외교사를 비롯해 역사·문화 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카우샬 쿠마르 네루대 한국학센터장은 AI가 교육 현장에 가져온 변화에 주목했습니다. 쿠마르 센터장은 "AI 때문에 학생들의 과제는 쉬워졌지만 오히려 실제 시험이나 언어 사용 능력에서는 격차가 드러날 수 있다"며 "AI를 배척하기보다 교육 과정에 활용하되 학생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함께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 한국어학과 최초의 한국인 학과장인 이계선 탕롱대 한국어과장은 "언어는 결국 문화"라며 "AI 시대가 도래할수록 기계적 번역을 넘어 한국 문화의 맥락과 감수성을 깊이 이해하는 인재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학과장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문화가 담긴 관용어 수업과 한국의 조직 문화에 대한 수업을 개설하는 등 학생들의 한국 문화 이해를 높이기 위한 커리큘럼을 구성했습니다.
한류에서 시작된 한국어 학습 열풍은 이제 한국 관련 진로와 직업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학가에서는 한국어 자체를 가르치는 데서 벗어나 다른 학문과 결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AI 번역이 보편화된 고용시장에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만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베트남 대학가에서는 학제 간 융합이 시작됐다. 호찌민국립인사대는 한국경영무역 전공을 신설했고, 석사 과정에서는 한국어 능력보다 명확한 연구 방향을 우선시하는 등 전공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류 뚜언 아잉 하노이국립인사대 한국학과장은 "학생들이 과학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학제 간 프로젝트와 연계 프로그램을 확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베트남의 카이스트로 불리는 백과대에서는 현재 공학 전공자들을 위한 한국어 과정이 개설돼 있습니다.
우이대 한국학과 역시 경영학과의 결합에 이어 향후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위한 커리큘럼 개편에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과 직접 부딪히며 언어와 문화를 익힐 기회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은 한국학 교육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술라스트리 학과장은 "과거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나 한국국제교류재단(KF) 등을 통해 원어민 교사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지 전임 교수가 늘어나면서 예전만큼 원어민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인도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아스나씨는 "과거에는 원어민 교수에게 수업을 들을 기회가 비교적 많았지만 지금은 학과 내 원어민 교수가 한 분뿐이고 강의 횟수도 적다"며 "어떤 학생들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면서도 원어민 수업을 한 번도 듣지 못한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학생 교류에도 제약이 있습니다. 쿠마르 센터장은 "교환학생 제도가 운영 중이지만 제한된 정원과 부족한 협정 대학, 양국 간 등록금 체계 차이와 불충분한 장학 지원 등으로 인도 학생들이 한국행을 망설이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대의 경우 정원 30명 가운데 교환학생으로 선발되는 학생은 연간 2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사정이 좀 나은 상황입니다. 일부 대학의 경우 코이카 등을 통해 한국인 교수들을 영입해 운영 중입니다.
우형민 KF베트남사무소장은 "KF는 해외 한국학 및 한국어 진흥을 위해 교수직 설치, 교원 고용 지원, 장학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며 "현지 대학의 전공 교수 부족으로 다양한 강의를 제공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대학과 현지 대학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필요한 강의를 제공하는 'KF 글로벌 E스쿨' 사업도 지속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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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protected] 김준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