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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열가지 병 중에 아홉가지의 원인은 담(痰)이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십병구담(十病九痰)은 열 가지 병 가운데 아홉 가지가 담(痰)과 관련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담(痰)은 다양한 질병의 중요한 병리 요인으로 여겨졌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십병구담(十病九痰)은 열 가지 병 가운데 아홉 가지가 담(痰)과 관련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담(痰)은 다양한 질병의 중요한 병리 요인으로 여겨졌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어떤 처녀가 장향(瘴鄕)에 와서 머물렀다. 장향은 풍토병이 심하고 기후가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변방 지역이었다. 특히 덥고 습한 기운이 오래 머물고 물과 음식마저 낯설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쉽게 병을 얻었다.

그래서 관료들에게 장향으로 유배를 간다는 것은 사실상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낯선 기후와 풍토병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문인 한유(韓愈)나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 등도 이러한 남쪽 장향으로 유배를 가 고초를 겪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처녀가 장향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지 몇 개월 정도 지났다. 낯설고 습열한 기후에 오래 노출되면서 비위의 기능이 약해져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상한 증상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 가래가 목구멍에 걸리고 가슴이 답답해지자 처녀는 급히 약방을 찾았다. 의원은 기가 막혔다고 보고 소합향원(蘇合香元)을 급히 먹여 위급한 증상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 뒤로도 매일 저녁만 되면 가래가 거슬러 올라왔다.

어느 날 저녁에는 처녀의 목구멍 속에서 컥컥 소리가 나고 손발이 허공을 어지럽게 휘저었다. 그리고 귀와 눈, 입, 코, 입술 등 얼굴의 모든 부분이 부들거리면서 떨렸다. 게다가 거품을 물면서 구토까지 하면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헛소리를 미친 듯 지껄이고 행동도 미쳐 날뛰는 듯했다. 증상이 워낙 변화무쌍하고 괴이하여 어느 한 가지 병으로 단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의원들은 처녀를 진찰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회충에 의한 병이니 회충약을 써야 낫습니다." 그러나 회충약을 써도 처녀의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다른 의원이 진찰을 해 보고서는 또 다른 진단을 내렸다. "이것은 전간(癲癎)입니다. 일종의 광증이니 광증약을 처방하지 않으면 차도가 없을 것입니다."

처녀는 광증약을 처방받았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전간은 오늘날의 간질과 유사한 병증으로, 갑자기 정신을 잃거나 경련하고 거품을 무는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일컫는다.

처녀는 결국 옆 고을의 명의에게 진찰을 받게 되었다. 명의는 진찰을 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병증은 담증(痰症)입니다. 담증은 원인은 한 가지지만 증상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녀의 이 기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증상은 날이 어두워지면 더 심해졌으므로 분명 담(痰) 때문입니다."

명의가 주목한 것은 증상 하나하나가 아니라, 여러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났다가 변화하는 양상이었다. 목구멍의 가래, 가슴 답답함, 구토, 경련, 정신혼미까지 서로 달라 보였지만 그는 그 밑에 하나의 공통된 원인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이 명의의 진단을 비웃었다. "내 살다 살다 담증에 의한 증상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익히 보지 못했소. 괜히 진단이 어려우니 가장 편한 병증으로 둘러대는 것 아니오?"

다른 의원도 거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처방을 조금만 더 복용하면 차도가 있을 텐데, 그렇게 며칠만 먹어보고 좋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환자의 병증을 너무 가벼이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처녀에게 육군자탕(六君子湯)을 기본으로 하되, 치자(梔子)와 황련(黃連)을 더해 가슴에 맺힌 화(火)를 내리고, 향부자(香附子)와 지각(枳殼)을 보태 울체된 기(氣)를 풀어 움직이도록 처방했다.

육군자탕은 비위를 보하면서 담을 삭이는 대표적인 처방이다. 비위가 허약하여 소화가 잘되지 않고 담이 생기면서 나타나는 식욕부진, 소화불량, 탄산, 구역과 구토, 만성 설사, 어지럼증, 가래 등의 병증에 폭넓게 활용한다. 명의는 단순히 담만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담이 생겨나는 근본인 허약해진 비위까지 함께 다스리려 한 것이다.

처녀는 명의의 말을 믿고 육군자탕 가미방을 복용했다. 그랬더니 그토록 모질게 굴었던 처녀의 증상들이 30여 첩을 복용한 뒤 모두 사라졌다.

옛말에 십병구담(十病九痰)이란 말이 있다. '열 가지 병 가운데 아홉 가지는 담(痰)과 관련이 있다'는 뜻으로, 그만큼 담이 다양한 질환과 증상에 관여한다는 의미다.

한의학에서 담은 단순히 목에서 뱉어내는 가래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생긴 병리적인 물질까지 넓게 포함한다. 담이 폐에 머물면 기침과 가래가 생기고, 가슴에 맺히면 답답하며, 위로 치밀면 어지럼증이나 구역감이 나타날 수 있다. 심규(心竅)를 가리면 정신이 흐려지고 헛소리나 경련 같은 증상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담증은 증상이 일정하지 않고 변화가 많아 다른 병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 처녀 역시 회충병이나 전간처럼 보였지만, 명의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보다 그 밑에 깔린 담과 기의 울체를 살폈다. 결국 담을 다스리고 막힌 기를 풀어 주자 여러 괴이한 증상이 함께 사라졌다.

십병구담이라는 말은 복잡한 증상일수록 겉모습에만 매이지 말고 그 증상들을 하나로 묶는 근본 원인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경보신편> 一室女來留瘴鄕, 一夕痰妨喉, 痰壅胸中, 以蘇合丸救急, 則其後每夕痰涎逆上矣. 一夕喉中噫噫, 手足乱動, 耳目口鼻唇面皆瞤動, 吐不收, 不知人, 不能言矣. 移時, 狂言譫語, 動作狂忘, 他醫以爲老蛔, 欲用治蛔之藥, 予獨以六君子湯, 加降火之行氣之材, 三十貼而差. 此病或以謂蛔或以爲癎, 然其怪幻莫測之症, 乘昏添重之狀, 必痰也. (어떤 처녀가 장향에 와서 머물렀다. 어느 날 저녁에 가래가 목구멍에 끼더니 가슴에 막혀 소합향원으로 급히 구하였는데, 그 뒤로도 매일 저녁만 되면 가래가 거슬러 올라왔다. 어느 날 저녁에 목구멍 속에서 컥컥 소리가 나고 손발을 어지럽게 움직였으며 귀ㆍ눈ㆍ입ㆍ코ㆍ입술ㆍ얼굴이 모두 부들거리면서 떨렸고 구토가 멈추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헛소리를 미친 듯 지껄이고 행동도 미쳐 날뛰었다. 다른 의원들이 오래된 회충 때문이라고 여겨 회충을 치료하는 약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내가 따로 육군자탕에 화를 내리고 기를 움직이는 약들을 더해 사용하였더니 30첩 만에 나았다. 이 병은 어떤 사람은 회충으로 생긴 병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간질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기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증상은 날이 어두워지면 더 심해졌으므로 분명 담 때문이었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email protected]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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