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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혼자 있을 때보다 만날 때 강해진다[박현주 아트에세이 ㊱]

뉴시스

강익중의 ‘3인치 한글 그림’이 만든 연결의 세계

[청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강익중의 한글 작품. 2024.07.04. pak7130@newsis.com
[청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강익중의 한글 작품. 2024.07.0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ㄱ은 혼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ㅏ도 그렇다.

둘이 만나면 ‘가’가 된다.

글자가 글자를 만나면 말이 된다.

말이 모이면 생각이 된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보고 싶다.

큰 말도 시작은 작은 자음과 모음이다.

한글은 혼자 있을 때보다 만날 때 강해진다.

화가 강익중의 그림도 그렇다.

그의 그림은 작다.

가로세로 3인치. 약 7.6㎝다.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이다.

시작은 생존이었다.

198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청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글 작가 강익중.뉴시스DB. 2024.07.04. pak7130@newsis.com
[청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글 작가 강익중.뉴시스DB. 2024.07.04. [email protected]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다.

작은 캔버스를 만들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꺼내 그렸다.

사람을 그렸다.

일상을 그렸다.

외워야 할 영어 단어도 적었다.

그림과 글자가 한 화면에서 만났다.

작아서 시작한 그림은 역설적으로 커졌다.

3인치 그림 옆에 또 하나가 붙었다.

천 개가 됐다.

만 개가 됐다.

작은 그림은 거대한 벽이 됐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서 공개한 강익중 '삼라만상' 2025.04.30.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서 공개한 강익중 '삼라만상' 2025.04.30. [email protected]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삼라만상’도 그렇게 태어났다.

1만 개의 작은 캔버스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작은 것이 모여 큰 세계를 만든다.

강익중 작업을 관통하는 원리다.

한글도 그렇다.

ㄱ, ㄴ, ㅁ, ㅅ.

하나하나는 작은 기호다.

자음이 모음을 만나 소리가 된다.

소리는 뜻이 된다.

뜻은 마음을 움직인다.

서로 떨어져 있던 것이 만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강익중에게 한글은 장식이 아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기호에 머물지도 않는다.

연결의 언어다.

그 한글은 한국 안에 머물지 않았다.

[카이로=AP/뉴시스] 24일(현지시각) 이집트 카이로 외곽 기자 피라미드 인근 사막에서 제4회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 현대 미술전이 열려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한글신전 '네개의 사원'이 전시돼 있다. 다음 달 1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에는 다양한 국가 작가들의 12개 작품이 전시된다. 2024.10.25.
[카이로=AP/뉴시스] 24일(현지시각) 이집트 카이로 외곽 기자 피라미드 인근 사막에서 제4회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 현대 미술전이 열려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한글신전 '네개의 사원'이 전시돼 있다. 다음 달 1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에는 다양한 국가 작가들의 12개 작품이 전시된다. 2024.10.25.

2024년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앞에도 한글이 섰다.

강익중의 ‘네 개의 사원’이다.

수천 년 전 만들어진 피라미드 앞에 네 개의 구조물이 들어섰다.

벽에는 ‘아리랑’이 적혔다.

한글로 썼다.

영어로 썼다.

아랍어로 썼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로도 썼다.

네 개의 문자가 하나의 노래를 불렀다.

신전 안에는 5016개의 그림이 걸렸다.

한국전쟁 실향민의 꿈이 있었다.

어린이의 꿈이 있었다.

난민의 꿈도 있었다.

사막의 바람이 불었다.

그림들이 흔들렸다.

서로 부딪쳤다.

소리가 났다.

피라미드는 과거였다.

사람들의 그림은 미래였다.

그 사이에 문자가 있었다.

언어가 과거와 미래를 이었다.

수천 년 전의 상형문자와 오늘의 한글이 한 벽에서 만났다.

아리랑은 국경을 건넜다.

한글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는 길이 됐다.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삼성전자가 한글날을 맞아 뉴욕한국문화원,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가와 함께 미국 주요 대학교에서 기술과 예술이 만나 한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한글 트럭'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2025.10.0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삼성전자가 한글날을 맞아 뉴욕한국문화원,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가와 함께 미국 주요 대학교에서 기술과 예술이 만나 한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한글 트럭'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2025.10.0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작은 글자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강익중의 작업은 말한다.

혼자 있는 하나는 작다.

그러나 연결된 하나는 더 이상 작지 않다.

몇 개의 선과 점에서 수많은 말이 태어난다.

우리는 그것으로 이름을 부른다.

마음을 전한다.

기억을 남긴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문장을 오늘 다시 읽는다.

글자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때로는 시간까지 잇는다.

그래서 한글날 강익중의 그림을 다시 본다.

한글이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글자로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같은 글자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같은 글자가 누군가를 살게 한다.

글자에는 선악이 없다.
어떤 말을 만들지는 사람의 몫이다.
그것을 연결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좋은 예술도 비슷하지 않을까.

거대한 것을 만드는 일만이 아니다.

떨어져 있던 것들을 잇는 일.

보이지 않던 사이에 길 하나를 내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길이 필요하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글자 몇 개를 골라보자.

사랑한다.
미안하다.

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큰 말도 시작은 작은 글자 몇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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