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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의 小說世說] AI 시대의 새로운 문맹

파이낸셜뉴스
권지예 소설가
권지예 소설가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는 조선어연구회 등이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해 최초로 '가갸날' 행사를 열었다. '가갸날'이라니, 이름부터 정겹다. 이후 1928년 '한글날'로 명칭이 바뀌었고, 광복 후에는 10월 9일로 기념일이 정해졌다.

15세기 조선에서는 한문이 문자 생활의 중심이었다. 우리말과 문법체계가 다른 한문으로는 자신의 뜻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 세종은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도록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580년. 이제 우리는 세계적으로 문자 해득 수준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우리말은 서툴러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도 낯설지 않다.

나는 10년 넘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을 심사해 왔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심사가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응모작이 예년보다 거의 두 배로 늘어난 데다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춤법은 정확하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동포들이 어떻게 이토록 유려한 우리말 문장을 구사할까.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은 글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서툰 글들을 김매기 하듯 솎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흠잡을 데 없이 그럴듯한 원고들 앞에서 오히려 망설여졌다. 잘 쓴 문장과 좋은 글은 같은 것일까. 문득 맞춤법이 조금 틀리고 표현이 투박해도 행간에서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삶의 진솔함이 묻어나던 예전의 글들이 그리워졌다.

요즘은 보고서와 논문, 자기소개서와 연애편지까지 AI가 써주는 시대다. 작가인 내가 보기에도 AI의 글쓰기 솜씨는 놀랍다. 몇 가지 경험과 메모만 입력하면 순식간에 제법 근사한 수필 한 편을 완성한다. 글쓰기에 서툰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인 기술인가. 하지만 문장을 만드는 수고가 사라질 때, 그 문장에 이르기까지의 생각과 망설임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소설가 김애란이 출연한 '손석희의 질문들'을 보다가 깊이 공감한 대목이 있었다. 그는 AI와 인간의 차이로 '망설임'을 꼽았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말을 삼키고 주저하는 순간에 배려와 품위가 있으며, 때로는 유려한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AI에겐 없지만, 인간에게는 말하는 능력만큼이나 말을 삼키는 능력도 있다.

580년 전 세종은 백성이 자신의 뜻을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었다. 100년 전에는 우리말과 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웠건만,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기계에 넘겨주려 한다. 문장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아무리 유려한 문장이라도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삶이 없다면 진정 자기 글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AI 시대의 새로운 문맹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자기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끝내 자기 문장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권지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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