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물든 가야산… 단풍 계곡 따라 천년의 역사를 만나다[Weekend 레저]
홍류동계곡 따라 해인사로 향하는 7.3㎞ 소리길
최치원 자취 남은 낙화담·첩석대가 차례로
팔만대장경 품은 해인사서 만나는 천년의 지혜
8만1258장 목판에 새겨진 고려시대 기록문화 인상적
눈에는 붉어진 가야산 담고, 귀에는 자연의 소리 담아
귀 기울이면 조용히 존재감 드러내는 새·풀·벌레·바람
가야산 생태탐방원에서 만난 귀로 즐기는 풍경
【합천(경남)·성주(경북)=정순민 기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1~1756)은 '택리지'에서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라 부를 만한 산이 없다"며 "오직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다"고 썼다. 가야산은 흔히 경남 합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경남 합천과 거창, 경북 성주와 고령 등 4개 군에 걸쳐 있다. 합천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유는 아마도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는 천년고찰 해인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이 시나브로 가을빛을 띠기 시작한 10월 초, 합천 해인사와 성주에 있는 가야산생태탐방원을 찾았다.
■가야산서 만난 천년의 지혜, 팔만대장경
가야산 여행의 첫 목적지는 홍류동계곡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소리길이다. 고려대장경 간행 1000년을 기념해 지난 2011년 문을 연 합천 대장경테마파크에서 출발해 해인사 영산교까지 이어지는 소리길은 약 7.3㎞에 이른다. 완만한 길을 따라 계곡과 숲을 감상할 수 있어 정상 등반이 부담스러운 여행객에게도 제격이다.
가야산에 도착한 첫날 소리길 일부 구간을 천천히 걸었다.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계곡에는 바위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가을이면 단풍이 물에 비쳐 붉게 흐른다고 해서 홍류동(紅流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라 말기 문장가 최치원이 은거하며 자연을 벗 삼았다는 곳답게 계곡 곳곳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낙화담과 첩석대 등 가야산의 명소들이 차례로 얼굴을 내민다. 겹겹이 쌓인 바위와 짙푸른 물이 어우러진 풍경에 걸음을 늦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물소리와 새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평소에는 하나로 뭉뚱그려 듣던 자연의 소리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소리길을 지나 도착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종찰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 사찰은 불교 경전의 가르침을 담은 팔만대장경과 이를 보관해온 장경판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내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에서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장경판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한 장식 대신 단정한 목조건물이 자리한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팔만대장경의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1237년부터 1248년까지 제작됐다. 경판은 널리 알려진 수치로 8만1258장에 이른다.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뿐 아니라 당대의 목판 인쇄 기술과 기록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고려대장경판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수백 년을 견뎌온 보존 기술이다. 건물 앞뒤의 창 크기와 위치를 달리해 자연스럽게 공기가 순환하도록 했고, 바닥에는 숯과 소금, 모래 등 재료를 활용해 습기를 조절하도록 설계했다. 전기나 현대식 공조 장치 없이도 목판을 오랜 세월 지켜온 선조들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장경판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마당에서 창살 너머로 경판이 빼곡하게 놓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전시관에서 숫자와 연도로 배웠던 팔만대장경이 비로소 실감 나는 순간이다. 수만 장의 목판을 만들고 글자를 새긴 이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온 사람들의 시간이 겹쳐진다. 가야산의 자연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해인사는 천년의 지혜를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가야산생태탐방원, 자연의 소리를 듣다
이튿날에는 가야산의 경북 성주 쪽 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립공원공단이 운영하는 가야산생태탐방원은 숙박과 교육시설을 갖춘 체류형 생태체험 공간이다. 해발 약 500m 산자락에 자리해 주변은 온통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심의 소음에서 한발 물러나 자연 속에서 쉬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다.
탐방원에서 경험한 프로그램의 핵심은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즉 '소리 풍경'이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랜드스케이프라면 귀로 듣는 풍경은 사운드스케이프다. 숲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감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세심하게 듣는 체험이다.
프로그램은 귀를 깨우는 연습부터 시작됐다. 여러 소리가 뒤섞인 음원을 들으며 특정 소리가 들릴 때 반응하고, 싱잉볼의 맑은 울림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집중했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동안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주변의 소리들이 살아났다. 풀벌레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산새의 지저귐이 하나씩 구분됐다.
자연에서는 어느 소리도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새와 풀벌레, 바람과 계곡물이 동시에 어우러진다. 무심코 '숲소리'라고 부르던 것들을 하나씩 나눠 듣는 과정은 자연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이어 요가 매트에 누워 창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거나 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누워 듣는 것만으로도 숲의 시간이 천천히 몸 안으로 들어왔다.
탐방원은 자연의 소리를 실내에서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야외 체험으로도 연결한다. 숲 곳곳에 마련된 소리 교구를 찾아다니며 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 참여할 수 있다. 자연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소리를 내는 생물이 살아갈 환경도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귀 기울이는 일이 생태계를 이해하고 보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숙박시설도 탐방원의 매력이다. 생활관과 독립형 숙소인 자연의 집이 숲을 배경으로 들어서 있다. 3인실부터 8인실까지 객실 유형이 다양해 가족 단위 여행객은 물론 단체 여행객도 이용할 수 있다. 자연의 집은 하늘채와 바람채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일부 하늘채 객실은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다. 교육관에는 강당과 강의실이 마련돼 있고, 식당과 야외무대, 전망대, 자연관찰로 등도 갖췄다.
탐방원 내 자연관찰로는 숲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산책 코스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무 사이로 숙박동이 모습을 드러내고, 네트 체험시설에서는 그물 위에 몸을 맡긴 채 색다른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대신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가야산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다.
[email protected] 정순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