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바둑, 새로운 시대를 열다[세계바둑산책 18]
이스탄불에서 5전 전승을 거둔 스테판 메다크
유럽 바둑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다
[파이낸셜뉴스]크로아티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독특한 국기와 축구다. 국기 한가운데 자리한 붉고 흰색의 체크무늬 문장, 그리고 그 무늬를 유니폼에 담고 세계 축구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 등장했던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운 아드리아해와 웅장한 성곽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인구 400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크로아티아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준우승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3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런 크로아티아가 이번에는 축구장이 아닌 바둑판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2026년 10월 11일,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도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크로아티아의 아마추어 6단 스테판 메다크(Stjepan Medak)가 제25회 이스탄불 국제바둑대회 정상에 올랐다. 5전 전승의 완벽한 우승이었다.
10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간 열린 이번 대회의 무대는 이스탄불의 도우쉬대학교(Doğuş University)였다. 8개국에서 130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유럽바둑연맹(EGF)이 운영하는 2026년 유럽 그랑프리의 보너스 C등급 대회이기도 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가 마주하는 도시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바둑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고 있다.
대회가 열린 도우쉬대학교는 1997년 설립된 사립 비영리 재단대학이다. 경제·경영, 법학, 공학, 예술·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대학 이름인 '도우쉬(Doğuş)'는 튀르키예어로 '탄생' 또는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이번 대회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 위스퀴다르(Üsküdar) 지역에 있는 첸겔쾨이(Çengelköy) 캠퍼스에서 개최됐다. 특히 대학의 지적 게임 동아리(Akıl Oyunları Kulübü)가 대회 개최에 참여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대학이 단순히 시설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 바둑교류의 현장에 함께한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학 바둑문화와도 닮아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바둑동아리는 바둑 보급과 교류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서울대학교와 도쿄대학교 사이의 대학생 바둑 교류가 오랜 인연을 만들어 왔듯이, 대학은 젊은 바둑인들이 국경을 넘어 만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 그리고 25회째를 맞은 국제바둑대회. 그 무대에서 크로아티아의 한 기사가 정상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크로아티아의 스테판 메다크였다.메다크는 첫 대국부터 승리를 이어갔다. 우승의 분수령은 제4국이었다. 1번 바둑판에서 만난 상대는 튀르키예의 강호 울라시 외렌(Ulaş Ören) 6단이었다. 두 선수의 대결은 사실상 우승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승부였다.
메다크는 이 대국에서 승리하며 우승에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마지막 제5국까지 승리한 메다크는 5전 전승으로 정상에 올랐다. 외렌은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알탄 쿤타이(Altan Kuntay), 같은 크로아티아의 로코 츠르벨린(Roko Crvelin), 하타이잔 외즈귀르(Hataycan Özgür)가 뒤를 이어 상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의 국제 바둑대회는 각국의 강한 아마추어 기사들이 국경을 넘어 만나고, 대국을 통해 기량을 겨루며 서로의 바둑을 배우는 무대다. 메다크의 우승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다섯 차례 대국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자리한 동남유럽 국가다. 아름다운 해안도시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수도 자그레브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국제 바둑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인구 규모나 바둑 인구만으로 보면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주요 바둑 국가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둑에서 국가의 크기가 반드시 실력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떠난 조치훈 9단은 일본 바둑계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명인과 본인방, 기성 등 최고의 타이틀을 차례로 차지했다. 당시 한국 바둑은 오늘날처럼 세계 최강의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은 세계 바둑의 중심이었고, 한국 출신 기사가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을 꺾고 우승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바둑 승부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조치훈이 일본 바둑계의 정상에 오를 때마다 한국인들은 그의 승리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바둑판 위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승부를 통해 한국인의 저력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시절 조치훈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었던 감동을 떠올리면, 이번 메다크의 우승도 크로아티아 바둑인들에게 상당한 자긍심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대회에서는 메다크뿐 아니라 같은 크로아티아의 로코 츠르벨린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한 선수의 우승을 넘어 크로아티아 바둑의 경쟁력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유럽 바둑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규모 동호인 공동체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뛰어난 아마추어 강자들을 배출한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는 전문적인 바둑 교육기관과 프로기사 제도를 중심으로 선수들이 성장한다. 반면 유럽에서는 직업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국제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는 강한 아마추어 기사들이 바둑문화를 지탱한다. 크로아티아 역시 이러한 유럽 바둑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메다크의 우승은 크로아티아의 젊은 바둑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인물은 황인성 8단이었다. 유럽에서 바둑 교육과 보급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황인성은 올해도 이스탄불 국제바둑대회를 찾았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대국 복기를 진행하며 자신의 경험과 바둑 지식을 나누었다. 유럽의 아마추어 기사들에게는 강한 선수와의 대국만큼이나 자신의 바둑을 분석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우는 기회가 중요하다. 황인성의 강의와 복기는 이러한 교육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활동이다. 한국 출신 지도자가 유럽 선수들을 가르치고, 크로아티아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며, 튀르키예의 대학생들이 대회 운영에 참여하는 모습은 오늘날 국제 바둑교류의 한 단면이다. 국적과 언어는 다르지만 바둑판 위에서는 모두 같은 규칙으로 만나고, 대국이 끝나면 함께 복기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바둑이 가진 가장 큰 국제적 자산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교류의 문화일 것이다.
이번 대회의 의미는 크로아티아 선수의 우승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6년 여름,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서는 유럽바둑콩그레스(European Go Congress)가 개최됐다. 유럽 각국의 바둑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국과 교류를 이어간 대규모 행사였다. 그리고 불과 두 달여 뒤, 이스탄불에서는 130명이 참가한 국제대회가 열렸다. 앙카라가 유럽 바둑의 대규모 축제를 보여주었다면, 이스탄불은 튀르키예 바둑의 지속성과 국제적인 교류 기반을 보여주었다.
튀르키예의 현대 바둑은 1980년대 후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앙카라의 중동기술대학교(METU)에서 시작된 초기 바둑 활동은 동호회와 협회 조직을 거치며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번 대회가 도우쉬대학교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더욱 뜻깊다. 튀르키예 바둑이 대학에서 싹을 틔웠고,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학이 국제대회의 무대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보급에서 대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학생들은 바둑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동아리를 만들고, 대회를 조직하며, 졸업 후에는 지역사회에서 바둑문화를 이어가는 주역이 된다. 크로아티아와 체코, 세르비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크지 않은 바둑 인구 속에서도 강한 아마추어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다른 나라 선수들과 교류하며, 때로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바둑을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높은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고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럽 바둑이 가진 독특한 힘이다. 도우쉬대학교의 이번 대회 참여 역시 대학 바둑동아리가 국제교류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스탄불에서 크로아티아의 메다크가 우승한 소식은 오는 11월 인천에서 열리는 세계 아마추어 바둑인들의 축제에도 관심을 갖게 한다. 지난 10월 6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는 제21회 국무총리배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준비단 제3차 회의가 열렸다. 정충의 인천시바둑협회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추진위원들은 대회 운영과 선수단 환영 등 주요 준비 사항을 점검했다.
세계 각국의 선수들을 맞이하기 위해 세심한 준비를 이어가고 있는 인천시바둑협회와 대회 준비단의 열정과 노력이 돋보인다. 이러한 정성이 세계 바둑인들에게 인천의 따뜻한 환대와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이번 이스탄불 국제바둑대회는 25회째를 맞았다. 그동안 대회를 이어온 튀르키예 바둑계의 노력과 각국 선수들의 꾸준한 참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대회가 열린 도우쉬대학교의 이름은 튀르키예어로 '탄생'을 뜻한다. 새로운 지식과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의 이름처럼, 이스탄불의 바둑판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이켜보면 조치훈이 일본에서 우승할 때마다 한국인들이 느꼈던 자부심 역시 한 사람의 승리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승리가 한국 바둑의 가능성을 믿게 했듯이, 메다크의 우승도 크로아티아 바둑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나라 크로아티아에서 온 한 기사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이스탄불에서 정상에 올랐다. 그의 다섯 번의 승리는 크로아티아 바둑이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세계 아마추어 바둑인들의 만남은 인천으로 이어진다. 오는 11월,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바둑인들이 인천에 모인다. 이스탄불에서 활약한 유럽 선수들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바둑인들을 직접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바둑을 통해 우정을 이어갈 날이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