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럽

"복지·평등·톨레랑스 공격받아"…프랑스의 가치들 벼랑 끝

뉴스1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폭동·약탈 사태로까지 번지며 충격을 준 프랑스 시위는 지난달 고등학교의 교육 환경 개선 요구에서 시작한 뒤 고물가에 항의하는 전국적 움직임으로 이어진 결과다.

구조적으로는 재정 적자와 공공서비스 축소, 계층 갈등 같은 문제가 누적되며 폭발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프랑스를 상징해 온 가치들인 복지와 평등, 톨레랑스(관용) 등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작은 과밀 학급과 교사 부족, 노후한 학교 시설에 항의하는 고등학생들의 학교 봉쇄 시위였다. 일부 과잉 진압이 사태를 키우고, 고물가와 생계 부담에 시달리던 노동조합과 시민들까지 동참하면서 일파만파 확산했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장기간 누적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 부실이 최고 수준인 프랑스 사회 안전망과 복지 제도, 교육·의료 등 공공서비스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진 현실이 있다.

저금리 시대에는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금리 인상기에 접어들며 국채 이자 부담까지 급증하고, 전쟁 발 에너지 가격 상승까지 겹치며 정부는 시민들의 예산 투입 요구에 대응할 재정적 여력을 갈수록 잃고 있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최근 3년 연속 국내총생산(GDP)의 5%를 웃돌았으며, 올해도 5.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EU)이 정한 재정적자 상한선인 3%를 크게 웃도는 유로존 최고 수준이다.

물가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해 2024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으며, 특히 에너지 가격은 21.3% 급등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가계의 연료비와 난방비뿐 아니라 기업의 운송·생산 비용까지 끌어올린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0.5%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 물가 상승에 따른 소비 위축이 경기 부진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제성장이 어렵고 더 이상 빚(국채)을 내기도 힘들면 기존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 온 연금 개혁은 반발에 부딪혔다. 2023년 어렵사리 연금 수급 연령(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국민적 반발에 밀려 지난해 말 이를 2028년 1월까지 연기했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주거 지원과 가족수당 등 각종 사회복지 지출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려 하지만 시민들은 생활고를 호소하며 공공서비스의 질이 낮아지는 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이자 금융위기 연구자인 케네스 로고프는 뉴욕타임스(NYT)에 "프랑스의 상황은 지속 불가능해 보이고, 국채 시장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만 아직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며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열차 사고와 같다"고 진단했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면서 복지 제도와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것은 프랑스가 직면한 어려운 과제다. 프랑스 작가이자 기업인인 미셸 드 로젠은 NYT에 "그것이 프랑스 분노의 가장 깊은 원천"이라며 "프랑스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한 세대 갈등과 빈부 격차 확대 등도 심각해지고 있다. 연금 개혁 과정에서 고령층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아 정부가 더욱 긴축 재정에 내몰리게 되고, 이것이 교육 등 공공서비스 전반의 악화로 이어졌다고 보는 젊은이들은 기성 시대와 정치권에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정부의 재정 여력 악화로 복지와 공공서비스가 무너지고, 고물가로 인한 생활비 급등이 계속되면 프랑스에 평등의 가치가 설 자리를 잃고 부자들만 살 만한 나라로 전락할 것이라는 좌절감과 분노 역시 이번 시위 사태에 동력을 불어넣고 있다.

재정 압박에 흔들리는 사회적 연대

시위대 일부의 폭력과 당국의 강경 대응이 맞물리면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해 온 프랑스의 전통적 가치인 '톨레랑스(관용)'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관용은 단순히 폭력을 자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요구와 입장을 인정하며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조정하는 태도를 뜻한다. 시위대의 폭력이 확산하고 당국의 대응이 강경해질수록 이러한 사회적 조정의 공간은 좁아질 수 있다.

시민들이 자신의 요구가 국정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공공서비스에 대한 신뢰마저 잃으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할 정치적 공간도 위축될 수 있다. 폭력과 약탈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치안 유지와 사법 처벌만으로는 오랜 기간 누적된 불만의 근본 원인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번 사태를 단순 무질서나 치안 문제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교육 환경 개선과 생계비 부담 완화 등 핵심 요구사항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면서 공공서비스를 유지하고 사회적 대화를 복원할 수 있을지가 프랑스 정부의 최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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