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세수 활용 논쟁 속…한은 총재가 던진 '재정 견제구'
(서울=뉴스1) 전민 기자 = 반도체 호황으로 불어난 세수를 어디에 쓸지를 두고 정부 안팎의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재정 지속가능성을 정면으로 거론했다. 일시적인 재원으로 한번 늘린 지출은 나중에 되돌리기 어렵다며 국회의 엄격한 예산 심사까지 주문했다.
통화정책 수장인 한은 총재가 재정 문제를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드문 만큼, 확장재정 기조에 대한 소신 발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긴축 기조를 이어가는 한은 입장에서 재정이 수요를 떠받치는 구도가 길어지는 데 대한 부담도 묻어났다는 평가다.
신 총재는 2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재정 엇박자 논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일시적인 재원으로 지속적인 지출이 생긴다면 지속가능성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속적인 지출로 이어지면 되돌릴 수 없는 항목들이 많이 생기고, 나중에 이를 되돌리려 할 때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짚었다. 지출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일시적인 재원이라면 얼마나 되돌리기 쉬운지를 함께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 총재는 "재정당국에서도 잘 살피고 있을 것"이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국회에서 심사를 엄격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재정 엇박자 질문에 두 달 전과 다른 답변…지속가능성 경고
지난 8월 간담회에서 같은 재정·통화 엇박자 질문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신 총재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재정지출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엇박자가 아니며, 오히려 통화정책을 돕는 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주 한은 국정감사에서는 구체적인 숫자를 내놨다. 신 총재는 내년 예산이 성장률을 0.5%포인트(p), 물가를 0.06%p가량 끌어올릴 것으로 추정했다.
내년 예산에는 투자성 지출도 많지만 현금 지원 같은 이전지출 항목도 상당한데, 이전지출은 재정승수가 0.2 정도로 낮아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재정승수는 정부가 1원을 쓸 때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신 총재는 같은 수치를 다시 언급하면서 "재정승수가 낮다고 해서 전혀 안심해도 되느냐"며 "지속가능성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에 미치는 단기 영향이 작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지출 구조가 굳어지는 문제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투자성 재정에 대한 여지는 남겼다. 미래 성장률을 높이는 투자라면 장기적으로 엇박자가 아닐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은 유지했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총수요에 가세해 물가 압력을 높일 수 있고, 투자 역시 잘 설계하고 시장 원리를 따져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초과세수·추가세수 쓰임새 논쟁…최고가격제도 같은 논리
신 총재의 발언 배경에는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급증이 있다. 정부는 올해 추가경정예산 대비 초과세수가 63조 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800조 원이 넘는 '슈퍼 예산'인 내년도 예산안에는 추가세수 162조 3000억 원을 미래대응기금 재원으로 반영했다.
이 돈의 쓰임새를 두고는 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있다. 올해 초과세수만 해도 재정경제부와 한은은 국채시장 안정을 위해 국채 발행 축소에 더 써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기획예산처는 금리 상승기 발행 축소 효과가 제한적인 만큼 미래대응기금 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점도 부담이다. 한은은 이날 기준금리를 연 3.00%로 동결했지만, 신 총재는 긴축적인 정책 기조를 계속 이어갈 필요가 있다며 물가 오름세가 목표 수준까지 안정적으로 수렴한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정부는 내년 총지출을 800조 원 이상으로 잡은 확장 예산을 편성했다. 금리로 수요를 누르는 사이 재정이 수요를 떠받치는 구도다.
정부가 시행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신 총재는 최고가격제가 유류 가격을 억제해 비용 상승이 다른 품목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고, 유가 불안 속에서도 소비자물가를 억제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가격 구조에 왜곡이 생긴다"며 소비를 줄여야 할 상황에서 소비가 억제되지 않고, 장기적으로는 재정 문제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한번 시작하면 거둬들이기 어려운 재정지출에 대한 경계라는 점에서 예산안에 대한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이어 "재정정책이 오래 지속되면 되돌리기가 상당히 힘들다"며 국제통화기금(IMF)도 에너지 가격 보조가 오래 이어져선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명확하게 권고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