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엄마, 내일도 애 좀 봐줘"… 주 26시간 '공짜 노동'에 무너지는 부모님의 황혼 [선 넘는 사람들]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조부모 53.3% 원치 않아도 손주 돌봄…가족의 사랑인가, 거절 못 할 희생인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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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아침 7시. 출근 준비에 쫓기는 딸이 아이를 맡기고 서둘러 문을 나선다.

친정어머니의 진짜 하루는 그때부터다. 밥 먹이고, 입히고, 치우고, 놀아주다 보면 퇴근 무렵엔 이미 파김치가 된다.

"엄마, 내일도 좀 부탁해." 딸의 절박한 목소리에 어머니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손주가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일상과 쉼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가정의 예외적 풍경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황혼 육아'의 아주 보편적인 민낯이다.

■ 주 26.8시간의 강행군… "싫어도 거절 못 한다"

통계는 현실의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55~74세 조부모 106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5월 발표)에 따르면, 53.3%는 "원치 않지만 자녀의 사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해" 손주를 돌보고 있다.

이들의 주간 평균 돌봄 시간은 무려 26.83시간. 평일 기준 매일 6시간 이상을 고된 육아에 쏟아붓는다. 단순히 '잠깐' 봐주는 수준을 넘어선 명백한 중노동이다. 후유증은 수치로 증명된다. 73.7%가 육체적 피로 증가를, 60.4%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지병이 악화됐다는 응답도 47.8%에 달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조부모가 절반(46.8%)에 육박하는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 월 30만원의 수당, 그리고 엇갈리는 시선

여기에 '보상'이라는 뇌관이 겹친다.

2022년 조사(한국리서치 등)를 보면, 응답자의 54%는 별도의 보수 없이 손주를 돌본다. 하지만 갈등의 진짜 원인은 '돈' 그 자체가 아니다. 자녀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지점은 양육관 충돌(36.1%), 육아를 당연시하는 태도(28.1%), 조부모의 의견 무시(26.2%) 등에 집중됐다.

금전적 불만(8.3%)은 오히려 후순위였다. 부모의 헌신을 '비용 제로(0)의 공짜 노동'으로 취급하는 무신경함이 관계의 균열을 부르는 셈이다.

지자체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경기도의 '경기형 가족돌봄수당'이 대표적이다. 친인척이 월 40시간 이상 아이를 돌보면 월 30만원(1명 기준)을 지원한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사회가 일부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하지만 월 30만원이 조부모의 잃어버린 노후에 대한 완벽한 청구서가 될 수는 없다.

본질적인 질문은 남는다. 돈을 준다고 부모의 헌신을 무한정 요구해도 되는가. 반대로 경제적 댓가가 없다고 해서 그 희생을 당연한 도리로 치부할 수 있는가.

■ 헌신은 당연하지 않다… 가족 내 '룰(Rule)'이 필요한 때

물론 조부모의 80% 이상은 돌봄을 통해 손주와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답한다. 자녀와의 관계가 개선됐다는 응답도 68%를 넘는다.

하지만 사랑과 노동의 피로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 손주를 향한 애정이 무한한 체력과 노후의 전면 포기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자녀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부모 역시 거절할 권리가 있다. 돌봄의 요일과 시간, 갑작스러운 부탁의 한계, 양육 방식에 대해 냉정하고 투명한 사전 협의가 절실한 이유다. 조부모가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 이를 배신이 아닌 노동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존중이 먼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당연한 희생, 과연 당신은 어디까지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묵직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mail protected]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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