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한글을 건넨 두 사람…로제타 홀·박두성과 훈맹정음 100년 [홍채완의 글로벌 이사람]
한지에 새긴 네 점, 세상을 연 여섯 점
[파이낸셜뉴스] 한글이 있어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씨를 볼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미국에서 온 의사는 기름 먹인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 글자를 옮겼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조선의 교사와 시각장애인 제자들은 여섯 개의 점으로 우리말을 읽고 쓰는 체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로제타 셔우드 홀과 박두성의 이야기다. 지난 4일은 박두성이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반포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역사 앞에는 홀의 '평양점자'가 있었고, 훈맹정음이 탄생한 뒤에는 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도록 책을 만들던 시간들이 있었다.
홀의 관심이 시각장애 교육으로 넓어진 계기는 평양에서 만난 소녀 오봉래였다. 봉래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다. 홀은 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부터 시각장애 교육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1894년 남편 윌리엄 홀이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홀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별 후 머물던 고국에서 그는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와 함께 점자 교육을 공부했다. 뉴욕 포인트를 개발한 윌리엄 웨이트를 찾아가 점자의 구조를 배우고, 이를 한국어에 적용할 방법을 살폈다.
그 결과물이 1897년 고안한 4점식 한글 점자였다. 홀은 한글 학습서인 '초학언문'의 내용 일부를 점자로 옮겼다. 기름 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 교재를 만들었다. 눈으로 읽던 글자를 손끝으로 읽을 수 있게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 교재는 오봉래를 비롯한 평양여맹학교 학생들의 교육에 사용됐다.
이화의료원 역사자료에 따르면 홀은 1898년 평양에서 봉래에게 본격적으로 점자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진도가 더뎠지만, 약 1년이 지나자 봉래는 홀이 준비한 교재들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봉래가 읽고 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른 시각장애 소녀들을 소개하면서 교육도 확대됐다. 한 아이를 가르치려던 시도가 더 많은 아이를 위한 배움의 자리로 이어졌다.
시작부터 거창한 사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이었던 박두성에게는 관사를 지원한다는 조건도 지원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이 그의 평생을 바꿨다.
당시 제생원에서는 일본어 점자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두성은 일본어 점자 교과서 제작에 나서면서도, 학생들이 우리말을 읽고 쓸 수 있는 점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평양에서는 홀이 만든 한글 점자가 사용되고 있었지만, 초성과 종성이 구별되지 않는 등 읽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박두성은 1920년부터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했다. 1923년에는 제자들과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연구를 이어갔다. 연구 과정에서 자음과 모음을 각각 3점과 2점으로 나타내는 '3-2점자'도 고안했지만, 초성과 종성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교사가 만든 문자를 기다리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들이 사용할 문자를 함께 연구했다.
박두성이 세운 원칙은 명확했다. 배우기 쉽고, 사용하는 점의 수가 적으며,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했다. 눈으로 한눈에 훑는 글과 손끝으로 차례차례 짚는 글은 읽는 방식이 달랐다. 같은 자음이라도 첫소리인지 받침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어야 했다.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훈맹정음은 여섯 점을 바탕으로 초성·중성·종성을 구별했다. 자음과 모음뿐 아니라 숫자와 문장부호 등을 표현하고, 자주 사용하는 글자는 약자로 나타냈다. 박두성은 1926년 11월 4일 이를 세상에 발표했다. '눈먼 이를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이름에는 훈민정음의 뜻을 잇겠다는 지향이 담겼다.
한 소녀를 가르치기 위해 점자를 배운 의사와, 제자들이 우리말을 읽도록 새 점자를 연구한 교사. 이들이 시작한 일은 문자표 한 장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읽을 책을 만들고, 그 책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보내는 일들로 이어졌다. 한지에 구멍을 내던 바늘과 전국으로 부쳐진 두꺼운 점자책 덕분에 한글을 읽는 사람들의 자리가 넓어졌다.
[email protected] 홍채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