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보유국 인정' 빼고 '대화' 꺼낸 김여정…북미 관계 미묘한 기류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이 미국에 '대북 적대 정책'의 포기를 거듭 요구했다. 김 부장은 대신 '핵보유국 인정'이라는 요구사항을 부각하지 않고, 대화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평화 수호를 위한 선택지에는 분명 대화가 포함돼 있다"라며 조건부 대화엔 아직 열려있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 재개를 두고 물밑 창구를 통해 기싸움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4일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김 부장은 이날 오전 조선중앙통신으로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 포기가 모든 문제 해결의 대전제이며 기본 열쇠"라며 "우리는 그간 이를 한두 번만 밝히지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적대적 대북 정책 철회'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어렵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김 부장의 이날 담화는 지난 3일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에 대한 북한 당국의 해킹을 부인하는 담화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전날 담화에선 바이낸스 해킹 소행을 부인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날 담화에선 미국의 대북 기조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춘 외교적 메시지를 내는 데 집중했다.
'핵보유국 인정' 언급 없이 '적대 정책 포기'에 집중…대화 조건 달라졌나
눈길을 끄는 것은 김 부장이 이날 담화에서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북미 대화의 직접적인 조건으로 내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해 10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비핵화 요구를 포기하고 현실을 인정한다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며 '핵보유국 인정'을 대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바 있다. 김 부장 역시 올해 7월과 9월 담화에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가 되돌릴 수 없는 '주권적 지위'임을 강조하며 비핵화가 더 이상 협상의 의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담화에서는 핵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포기'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언급하면서, 대화 재개의 조건이 마치 한 가지로 굳어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북한이 근본적으로 핵보유국 지위 인정 요구를 철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 부장은 이날도 미국이 한미일 3자의 외교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언급한 것을 적대 행위의 첫 번째 사례로 거론했다. 다만 이는 북한이 '핵보유국 인정'을 '적대 정책 포기'보다 하위 조건으로 조정한 것이라는 해석도 조심스럽게 가능한 대목이다.
김 부장은 전날인 3일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의 적대적 태도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재고해 볼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미국과 '뭔가를 할 수도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낸 바 있다.
그는 이날 담화에서도 "미국이 연속적으로 발신하는 적대적 신호에 우리는 다른 식으로 회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라거나 "평화 수호를 위한 선택지에는 분명 대화가 포함돼 있다"라면서 비록 적대적이지만 상호 소통이 진행되는 듯한, '외교적 메시지' 발신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북미가 비공개 접촉을 진행 중일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미국이 대화를 원한다면 미국의 독자제재 등 적대적 정책의 폐기를 통해 대화와 북한의 국가 이익이 일치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라고 분석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이번 담화를 '조건부 거부'로 평가했다. 김 부장이 대화 거부의 대상을 미국 전체가 아닌 '대결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로 한정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대화를 선택지에 남겨둔 채 그 가능성만 낮춘 것"이라며 미국에 적대 정책 포기의 신호를 먼저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문본' 먼저 작성 정황에 눈길…워싱턴 겨냥한 메시지 부각에 집중
이번 담화가 미국을 향한 외교적 메시지 강조를 위해 나왔다는 정황이 담화의 내용은 물론 문체에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홍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김 부장의 담화에 통상적인 북한식 표현과 달리 영어 문장을 '조선어'로 직역한 듯한 문장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표적으로 "적대적 신호는 우리로 하여금 미국이라는 실체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재고하도록 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hostile signals are compelling us to reconsider'로 시작하는 영어의 사역 구문을 직역한 형태에 가깝다는 것이 홍 선임연구위원의 분석이다. 북한식 표현이라면 '우리는 미국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또 "적대적 신호에 우리는 다른 식으로 회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라는 표현 역시 영어의 'We know no other way to respond to hostile signals'라는 관용적 문장을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고 홍 선임연구위원은 짚었다. 이 밖에도 '정략적 수익', '역행성 행보' 등의 표현 역시 영어 추상명사 구문의 번역투에 가깝다고 홍 선임연구위원은 해석했다.
홍 선임연구위원은 "'조선어'로 담화를 먼저 썼다면 영문본이 어색해야 하는데, 이 담화는 '조선어 버전'이 오히려 문장이 어색하다"라며 영문본을 먼저 작성했거나 영문 번역을 전제로 조선어본을 구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는 김 부장의 이번 담화가 미국의 백악관과 국무부 등 정책 결정자들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결과라는 게 홍 선임연구위원의 분석이다. 이러한 '어색한 문장'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발표된 김 부장과 최선희 외무상의 대미 담화에서도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대화 여지 남기면서 군사 도발로 협상 카드 몸값 높이기…美 선택 압박
김 부장이 이틀 연속 담화를 발표한 시점도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 둔 상황에서, 북한이 대화 조건을 부각하며 미국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국의 중간선거(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대북 외교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 속에서 나온 행보이기도 하다.
특히 김 부장은 이날 "미국의 적대 정책 실행에서 새로운 기록이 세워지고 있다"라며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의 반사적 대응에서도 새로운 기록들이 창조돼야 한다"며 미국이 대북 기조에 변화를 주지 않을 경우 물리적 대응 수위를 높일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이 미국 본토 타격용으로 개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시험발사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본다. 북한은 2024년 10월 31일 '화성-19형' ICBM 발사 이후 ICBM 시험발사를 중단한 상태다.
지난 2025년 10월 노동당 창건 기념일 열병식에서 처음 공개한 '화성-20형' ICBM의 시험발사는 아직 진행된 바 없는데,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무기를 처음으로 시험발사하며 미국 조야에서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실체적이니 협상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거지게 할 수 있다고 예상하기도 한다.
실제 북한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날까지 네 번의 군사 도발을 단행하며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주목도를 높이기도 했다. 대화와 도발을 병행하면서 미국의 선택을 촉구하는 모양새라는 분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