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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빚 탕감 받고 또 탕감, 도덕적 해이 키우는 부채 털기

정부가 '빚 탕감' 정책 기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도덕성 해이 논란도 커지고 있다. 현 정부의 금융 정책 기조는 '포용 금융'이다. 포용 금융 관점에서 채무조정을 실시하면 연체와 추심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또 빚에 짓눌린 사람이 경제활동에 복귀하도록 돕는 순기능도 있다. 그러나 정책의 부작용이 이런 장점을 상쇄한다는 우려도 크다. 대표적으로 다시 채무조정을 신청하는 사람이 올해 3만명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소속 이종욱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1~8월 채무조정 재신청자는 2만7864명이다. 지난해 전체 재신청자(3만3718명)의 82.6%에 달하는 수치다. 이런 속도라면 연말까지 전년도 수치를 뛰어넘을 전망이다. 채무탕감은 재기를 돕는 것이 주요 취지다. 그런데 올해 빚 탕감을 받은 자가 또 신청한다면 현행 채무조정 제도의 구조적 한계가 있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근본적으로 구제 대상이 넓어지고 채무를 탕감 받았다가 또 신청할 수 있는 문턱이 낮아지면 신청자가 더 몰리는 건 명약관화하다. 이런 혜택은 도덕적 해이를 낳아 금융 약자를 돕는다는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다. 정부가 빚을 탕감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퍼지면 상환 의지는 약해지고, 새로 빚 내는 일도 쉽게 여긴다. 이렇게 개인에서 비롯된 금융 부채를 정부가 털어준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성실하게 대출금을 상환해온 사람들이 지게 된다. 더구나 원리금을 갚아온 사람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사회적으로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물론 최근 국내외 금리 기조는 고금리로 전환되고 있다. 전반적인 금리가 상승하면 대출이 많은 가계는 이자 비용이 더 늘어나 금융부담이 더욱 커질 것이다.따라서 고금리 시대를 대비해 서민들의 금융 리스크를 선제대응하는 조치가 필요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빚 탕감을 해주면 금융 부채를 낮출 수 있다는 근시안적 정책 태도는 바꿔야 한다. 채무 탕감 위주의 정책에 주로 기댈 게 아니라 경제활동에 복귀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긴밀하게 연계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빚을 털어줘도 계속 빚이 쌓이는 것은 소득이 지출에 못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래서 지금 당장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을 두고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빚 탕감 외에 소득 연계 프로그램 등 복합적 지원을 강구하기 바란다. 아울러 채무조정이 필요한 대상을 선별하는 작업도 신중해야 한다. 탕감은 엄격한 선별을 거쳐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반복적으로 채무 탕감을 신청하는 자는 상환 능력 점검과 소득·취업 지원을 의무적으로 연계하는 방안이 요구된다. 성실 상환자가 손해 본다는 인식이 퍼지지 않아야 정책 신뢰가 쌓일 수 있다.

[사설] 200조 미래대응기금, 국회 통제 오히려 강화해야

국회가 정부의 미래대응기금 운용 재량권에 제동을 걸었다.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가 최근 국가재정법 개정안 검토보고서를 통해 미래기금이 국회의 재정 통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부는 경기와 세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려면 기금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기금은 내년 162조원 규모로 시작해 200조원 안팎까지 커질 수 있다. 원칙과 견제 없이 정부 편의대로 사용돼선 안 될 막대한 국민 혈세다. 문제가 된 것은 기금 지출을 국회 의결 없이 30%까지 자체 변경할 수 있도록 한 특례다. 이대로라면 내년 사업비 45조4000억원을 기준으로 최대 13조6000억원가량을 정부 판단으로 바꿀 수 있다. 통상 30% 한도는 지출 변동이 큰 금융성 기금에 적용한다.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 등 사업성 지출이 대부분인 미래기금에 이런 예외를 둘 근거가 충분치 않다. 세수 결손 때 추가경정예산 없이 기금 여유재원을 일반회계로 가져다 쓸 수 있게 한 특례도 마찬가지다. 세입이 줄면 지출 항목과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고, 이는 당연히 국회 심의 대상이다. 더 근원적인 우려는 기금의 재원과 지출 구조다. 미래기금의 핵심 재원은 내년도 내국세 세입예산 가운데 최근 10년 증가 추세를 웃도는 추가세수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세수도 금세 줄어든다. 반면 청년 일자리와 주거, 장학금, 지방 지원 등 한번 시작한 사업은 다시 줄이려면 엄청난 저항이 따른다. 수입은 들쭉날쭉하는데 지출만 고정되는 구조는 재정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반짝 세수로 상시적인 지출부터 늘렸다가 세수가 꺾이면 결국 일반회계나 국채로 메워야 한다. 세수가 잘 걷힐 때라면 새 사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빚을 갚는 것도 중요하다. 나랏빚을 줄일 기회를 놓치고 지출 구조부터 키우는 것이 과연 미래를 위한 선택인지 따져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국채시장이 흔들리는 가운데 프랑스의 금리 상승은 유독 가파르다. 최근 프랑스 국채 금리는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0년물의 독일 국채 대비 금리 차도 1.3%p에 이른다. 2012년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가장 큰 격차다. 급기야 전통적으로 재정 위험국으로 여겨졌던 이탈리아보다 웃도는 이례적인 상황이다. 한때 유럽의 대표적 안전자산이었던 프랑스 국채가 이 지경까지 몰렸는데, 곱씹을 대목이다. 시장은 프랑스 재정을 의심하고 있다. 올해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대 중반에 이르고 국가채무는 119%를 넘어섰다. 공공지출은 GDP의 57.2%로 유로존 평균보다 7.4%p 높다. 연금과 보건 등 사회보장 지출이 큰 몫을 차지한다. 올해 성장률은 0%대에 머물 것이라는데 정치권은 재정개혁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과거 낮은 금리로 조달한 국채를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하면서 이자 부담도 커졌다. 빚이 금리를 올리고, 오른 금리가 다시 재정을 압박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미래 산업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기존 예산 사업을 기금으로 옮겨 담거나 지원 대상을 넓혀 상시 지출을 늘려서는 안 된다. 세수가 줄면 지출도 자동 조정되는 장치가 필요하다. 30% 자체변경 특례도 전면 재검토하고, 일정 규모 이상 변경에는 국회 사전 심의를 못 박아야 한다. 세수가 잘 걷힐 때 빚을 줄이고, 재정 여력이 줄어들 때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 대응이다.

[강남視角] 기후위기, 한국도 공범인가

지난 8월 26일 네팔에서 벌어진 대홍수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과 토사가 마을을 덮치고 도로와 다리를 무너뜨리는 모습은 기후위기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기후재난의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분노한다.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기업, 탄소배출을 줄이지 못하는 정부,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재난의 영상에서 눈을 돌리고 나면 우리의 삶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온다. 총알배송을 이용하고, 배달음식을 시키고, 자동차를 타고, 한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조금 더 빠른 배송, 조금 더 싼 가격, 조금 더 편리한 서비스를 원한다. 그러면서 그 편리함을 가능하게 하는 화석연료 산업을 비판한다. 우리는 악당을 싫어하지만, 악당이 만들어주는 편리함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 모순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디거'의 주인공 디거 록웰은 환경을 파괴하며 석유를 캐는 인물이다. 그는 기후위기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을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석유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석유를 캐는 것일 뿐이라는 논리다. 물론 이 논리가 석유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기업은 이윤을 위해 화석연료 의존을 확대해왔고, 기후위기의 위험을 축소하거나 외면해온 책임이 있다. 하지만 록웰의 말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유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기 전에 석유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기업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산하고 시장은 수요에 반응한다. 물론 기업과 개인의 책임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기업은 소비를 설계하고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자인 우리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기후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모순은 석유 자체보다 석유가 만들어내는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후위기의 원인을 멀리 있는 누군가의 욕망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팔의 홍수는 그 구분이 얼마나 편리한 착각인지를 보여준다. 기후위기는 어느 한 사람이나 기업이 혼자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다. 거대한 자본과 정치적 선택, 그리고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편리한 삶을 원해온 수많은 사람의 욕망이 얽혀 있다. 물론 개인이 에어컨을 덜 켜고 배달을 한 번 덜 시킨다고 기후위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업과 정부의 구조적 변화가 먼저 필요하다. 그러나 불편함을 조금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서 편리함을 만들어내는 시스템만 비난하는 것 역시 문제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때다. '누가 악당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라고. 더 빠른 배송을, 더 많은 소비를, 더 시원한 여름을, 더 따뜻한 겨울을.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석유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석유를 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채굴장은 멀리 있고, 정유공장은 보이지 않고, 탄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버튼 하나로 에어컨을 켜고 스마트폰 하나로 물건을 주문한다. 그렇게 악당의 얼굴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 뒤 편리한 삶을 지속하려 한다. 네팔의 물살과 '디거'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만난다. 기업과 정부에 더 큰 책임을 묻는 것과 우리의 욕망을 돌아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한다.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이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조금 덜 원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순간, 비로소 기후위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email protected]

[테헤란로] 호남에 '공공 파운드리' 건설을

"반도체 분업 생태계를 완성하려면 공공 파운드리 건설이 필요하다."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초대회장을 지낸 이서규 픽셀플러스 대표는 "대만에서 정부 주도로 TSMC(세계 최대 파운드리)를 설립한 이후 반도체 분업 생태계에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호남 메가프로젝트에 공공 파운드리 건설이 꼭 포함됐으면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반도체 산업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선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고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요가 늘어난다. 특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HBM 시장을 주도한다. 반도체 호황이 앞으로 수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 7960억달러에서 올해 1조5110억달러로 90%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에도 올해보다 26% 늘어날 전망이다. 반도체 호황의 수혜는 대기업에 머물지 않는다. 반도체 설계업체 팹리스에서 전공정을 담당하는 파운드리, 후공정 패키징, 검사 전문 테스트하우스에 이르는 중견·중소 반도체 업체들 역시 호실적을 이어간다. 실제로 팹리스 업체 파두는 지난 2·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3배 늘어난 732억원이었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 하나마이크론은 같은 기간 매출이 2배 늘어난 6832억원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도 반도체 분업 생태계가 성숙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대부분 팹리스가 시스템반도체에 주력하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이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시스템반도체까지 강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우려 역시 공존한다. 반도체 분업 생태계 허브 역할을 하는 파운드리가 대만,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열악하다. 팹리스가 만든 반도체를 발 빠르게 생산한 뒤 시장에 적절하게 내놓을 수 없다면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들여 만든 반도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정부는 호남 메가프로젝트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아직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에도 10년 이상 반도체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정부가 이런 노력 대신 호남 메가프로젝트에 공공 파운드리 건설을 핵심 과제로 추진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메모리반도체만 강한 반쪽짜리 반도체 강국 멍에를 벗고, 시스템반도체까지 강한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란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다. [email protected] 강경래 기자

[포럼] 반도체 호황기, 불황 대비할 때

최근 반도체 업황 회복과 함께 영업이익을 성과급으로 나누자는 논쟁이 주목받고 있다. 호황기의 성과를 근로자에게 정당하게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산업정책 관점에서는 이와 별도로 질문을 한 단계 넓힐 필요가 있다. 그 성과가 협력기업과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포함한 산업생태계의 역량으로 전환되는지, 다음 불황을 견딜 준비로 이어지는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경기순환성이 큰 산업에서는 호황의 이익이 선도기업에 집중되는 반면, 불황의 충격은 발주 축소와 투자 지연, 금융 위축을 통해 공급망 전체로 확산된다. 자금조달 여력이 낮은 중소·중견기업은 일시적 매출 감소에도 연구개발을 중단하고 핵심 인력을 줄이거나 설비를 매각한다. 사라진 기술과 숙련, 인증과 생산역량은 다음 호황이 와도 단기간에 복구하기 어렵다. 호황기 과실은 현재에 배분되지만 불황기 비용은 산업 전체와 정부가 뒤늦게 부담하는 셈이다. 산업정책은 개별기업 지원을 넘어 공급망과 산업생태계의 경쟁력·회복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중 경쟁과 공급망 재편, 인공지능과 탄소중립 전환 속에서 전략산업 경쟁력은 한 기업의 투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요기업과 협력기업, 금융과 인력, 기술과 인프라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공급망 유지의 편익은 고용과 지역경제, 경제안보로 확산되지만 그 비용은 특정 기업에 집중된다. 불황에는 금융기관도 위험회피적으로 변해 경쟁력 있는 기업까지 자금난에 빠진다. 이는 개별 계약과 기업 대응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산업 차원의 공통위험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기업의 이익을 강제로 환수하거나 불황 때마다 재정을 투입하는 방식이 답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민간의 책임과 정부의 조정·인센티브를 결합한 경기대응형 산업정책이다. 경기순환성이 크고 공급망 연계가 강한 산업에서는 참여기업이 호황기에 자율적으로 공동재원을 조성하고, 정부는 세제와 정책금융으로 참여를 안정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 이 재원은 불황기에는 경쟁력 있는 중소·중견기업의 유동성과 연구개발, 핵심 인력 유지에 활용하고, 평시에는 공동 연구개발과 생산성 향상, 공급망·고객 다변화에 투자할 수 있다. 물론 해당 제도가 강제적 이익환수나 부실기업 연명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간이 먼저 위험을 부담하고 정부 지원은 조건부·추가적으로 제공돼야 한다. 근로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협력기업의 적정 납품대금을 대체해서도 안 된다. 일시적 유동성 위기와 구조적 경쟁력 저하를 구분하고, 지원 이후에는 상환과 성과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좋은 산업정책은 위기가 닥친 뒤 특정 기업을 구제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호황기에 다음 불황을 견딜 기업과 기술, 사람과 공급망을 함께 준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제 호황기의 성과를 누가 얼마나 나눌 것인가를 넘어 산업의 성과를 어떻게 지속가능한 역량으로 전환할 것인지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약력 △애리조나주립대 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현) △OECD 산업혁신기업가정신위원회 부의장(현) △미네아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연구원(전) 조재한 산업연구원 산업미래정책센터장

[손성진 칼럼] 박정희 자작극, 얼토당토않은 가정

끝내 진영 갈등으로 번지고 말았다. 영화 '암살자(들)'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관객 200만명 돌파라는 소득을 건졌지만, 이 문제를 둘러싸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진실은 외면한 채 각자의 논리로 옹호하고 공격하고 있다. 실체적 진실이라는 사법적 용어가 있다. 진실은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을 판별하는 도구다. 진영 논리로 따질 게 아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은 99%가 진실이고 의혹은 1%에 불과하다. 실체적 진실이 확인됐다고 할 사건이다. 증거와 정황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 영화는 작은 의혹을 크게 부풀렸다. 수많은 국민이 TV로 현장을 보고 있었고 수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나 다른 세력의 개입에 관한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다. 의심하려면 이런 명백한 사실에 반하는 증거(반증)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국면 전환을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의혹은 추측일 뿐이다. 아무런 증거가 없다. 탄환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역시 의문점일 뿐이다.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에 육 여사가 맞은 것은 미국 CBS의 방송 필름에 증거로 남아 있다. 제작자 측은 미국 필름이 조작됐다고 말할 수 있나. 자작극이라면 문세광을 박정희가 조종했다는 말이 되는데, 얼토당토않다. 문세광이 쏜 총탄 중 한발은 박정희가 연설하던 연단으로 날아가 박혔다. 자작극을 펼치면서 부인을 죽이라고 했을지언정 자신에게도 총을 쏘라고 할 리가 만무하지 않나.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야를 권유했었는데 (사후) 100일 동안 만약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아내가 아직 살아있었을까 생각했다'는 박정희의 말도 미국 문서에 남아 있다. 문세광은 사형 집행 직전에 이렇게 마지막 말을 했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박 대통령께 진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육 여사와 죽은 여학생의 명복을 저승에 가서도 빌겠습니다. 조총련에 속아서 이러한 과오를 범한 나는 바보였으므로 사형을 당해도 당연합니다." 박정희의 자작극이라면 이 유언까지 조작하거나 강요했다는 뜻이다. 박정희가 패륜을 자청했다 해도 유언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74년은 10월 유신 2년 후로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발령된 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재야와 대학가의 반발이 있었지만 국정을 휘어잡고, 옳든 그르든, 통치권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특히 남북대화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엄청난 사건을 벌여 분란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허진호 감독은 사건의 배후에 박 대통령이 있는 것으로 그리지 않았다고 발을 뺐다. 그것이 진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석은 제작자가 아니라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그렇게 느끼면 그런 것이다. 허 감독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권력 암투 가능성을 대신 내세웠다. 당시 중정부장은 신직수로 박정희에게 충성하던 인물이었고 사건 이후에도 2년 반을 더 재직했다. 영화가 사건의 진실을 좇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영화는 허구와 상상을 바탕에 깔고 흥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진실과는 완전히 방향이 다르다. 영화로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는 모순적 행위인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자주 만들어진다. 존재하는 사진과 영상을 삽입하며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 제작된다. '암살자(들)'은 '등장인물과 구체적 사건은 일부 각색됐다'는 자막을 넣고는 사건 당시 화면을 삽입하며 다큐멘터리 흉내를 내 관객들의 믿음을 얻으려 했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극적 효과를 위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넣거나 과장해서 표현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역사 드라마도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TV 사극의 거장 신봉승 작가는 "재미있게 꾸미되 사실과 달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늘 조선왕조실록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 영화나 드라마들이 사실(事實) 또는 사실(史實)과 허구를 섞은 '팩션(Faction)'으로 관객이나 시청자를 호도하고 있다. 경계가 불분명한 극을 보고 진실로 믿게 되고, 이는 국민 전체의 역사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왕과 사는 남자'에도 허구적 요소가 다분하다. 흥미를 위한 역사의 극화도 진실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특히 유족이나 후손 등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영화는 명예와 관련이 있으므로 더욱더 유의해야 한다. 관객과 대중은 언제나 제작자보다 똑똑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일부를 위해서라도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거짓으로 선동하는 영화는 범람하는 가짜뉴스와 다를 바 없다. [email protected]

[기고] '붉은사막' 글로벌 성공의 정책적 시사점

펄어비스의 '붉은사막'은 전 세계 6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약 81%가 한국 게임의 불모지였던 북미·유럽 시장에서 판매됐다. 물론 '붉은사막'은 오랜 개발 기간과 막대한 개발비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이러한 서구 시장에서의 성공은 단순히 높은 제작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펄어비스가 서구 이용자들이 원하는 콘텐츠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붉은사막'은 서구권에서 선호하는 자유도 높은 오픈월드, 방대하고도 다양한 퀘스트, 입체적인 캐릭터, 숨겨진 요소, 주변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매우 세심하게 구성했다. 이는 고유한 개성을 가진 고정된 캐릭터가 출연하고 스토리의 완결성과 서사를 중시하는 동아시아권에서 선호하는 게임과는 궤가 다르다. 이러한 서구권을 대상으로 한 게임의 개발은 단기간에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다. 오히려 펄어비스의 오랜 서비스 경험과 꾸준한 연구개발(R&D)을 통해 형성된 경쟁력이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렇게 서구권 이용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은사막'은 '아침의 나라' 라는 확장팩을 통해 한국적인 건축과 의상, 문화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게임 속에 녹여냈으며, '붉은사막' 역시 곳곳에 한국의 서낭당 등을 모티브로 한 건물 등을 배치하는 등 한국 개발사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감성을 담아냈다. 이처럼 게임은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문화콘텐츠 산업의 핵심 분야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글로벌 진출을 위해서는 각 국가와 지역의 문화적 특성, 이용자 성향, 소비 패턴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게임 개발에 반영하는 문화 연구와 시장 분석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연구는 게임의 흥행 가능성을 높일 뿐 아니라 국가 브랜드와 문화 확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펄어비스의 과감한 승부수로 해외 시장에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글로벌 시장 분석과 게임 이용자에 선호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 올린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시작하는 대부분의 인디 게임사에게는 현실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인디 개발사는 개발 인력 확보와 제작비 마련만으로도 큰 부담을 안고 있어 해외 문화 연구나 이용자 분석까지 자체적으로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한국의 인구 변동등의 이유로 게임 이용률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해외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 정책은 단순히 개발비를 보조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해외 주요 시장의 문화와 이용자 성향을 체계적으로 조사·분석하는 연구개발(R&D)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그 결과를 국내 게임 개발사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공 연구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인디 게임사들도 목표 시장에 적합한 콘텐츠를 보다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K-게임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한국 문화콘텐츠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황성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고] 한국 통상전략의 새로운 선택지 CPTPP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세계 통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공통 규칙을 만들고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장을 넓히던 통상정책은 이제 공급망, 첨단기술, 투자와 경제안보까지 아우르고 있다. 미·중 경쟁이 기술과 공급망으로 확산될수록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부담도 커지는 상황에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뉴질랜드·싱가포르·칠레·브루나이가 추진한 P4에 미국 등이 참여하면서 2016년 12개국이 참여하는 TPP로 확대됐지만 이듬해 미국이 탈퇴했다. 일본 등 나머지 11개국은 기존 협정의 상당 부분을 유지해 2018년 CPTPP를 출범시켰다. 이후 영국의 가입으로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외연을 넓혔다. CPTPP의 의미는 관세 인하에만 있지 않다. 상품·서비스·투자는 물론 전자상거래, 지식재산권, 국영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공통 규범을 추구한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G2가 모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은 한계이자 특징이다. 일본, 캐나다, 호주, 영국, 멕시코, 베트남 등 이해관계가 다른 국가들이 공통 규칙을 기반으로 협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중 대립에 대응하는 배타적 경제블록으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G2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다른 국가들이 규칙을 만들고 협력할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회원국 상당수와 FTA를 체결하고 있어 추가 관세 인하만으로 가입의 의미를 설명하기 어렵다. 디지털 무역과 공급망, 핵심광물, 환경 등 중요성이 커지는 통상규범의 형성과 발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CPTPP는 시장 확대의 편익만으로 가입을 추진해선 안 된다. 농업 등 경쟁력이 취약한 분야에는 수입 확대와 가격 하락에 따른 조정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입 논의와 함께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의 보완대책을 패키지로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일회성 보상을 넘어 피해보전과 소득안정, 경쟁력 제고, 구조전환을 결합해야 한다. 농업·수산업에는 소득·가격안정 장치와 직불제·보험 확대, 생산성 향상과 품목 전환 지원을 검토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는 정책금융과 설비·기술 투자, 인력 재교육과 사업전환 지원을 연계하고, 피해가 집중되는 지역에는 산업 전환과 고용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지원은 개방의 충격을 생산적인 구조전환으로 연결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농가의 경영위험을 줄이는 가격안정제와 수입안정보험 등 기존 안전망도 CPTPP 논의에 체계적으로 연계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CPTPP 하나에 한국의 통상전략을 걸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나의 협정이나 특정 국가와의 관계만으로 모든 위험을 관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WTO라는 보편적 다자체제를 기반으로 CPTPP, 양자 FTA,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디지털·공급망·핵심광물 분야별 협력체를 함께 활용하는 다층적 통상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미·중 경쟁이 심화될수록 한국은 가능한 한 많은 협력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CPTPP는 그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핵심은 가입 자체가 아니라 시장과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새로운 통상규범 형성에 참여하면서 국내 피해 분야의 구조전환을 지원하는 것이다. 강문성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명절 밥상에서 시작되는 상속 분쟁[알쏭달쏭 상속]

[파이낸셜뉴스] 추석 연휴가 끝나면 변호사 사무실의 전화가 바빠진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묵혀 두었던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흔히 명절 직후에는 이혼 상담이 늘어난다고들 한다. 그런데 필자가 체감하기로는 상속 관련 상담도 그에 못지않게 늘어난다. "아버지가 큰형에게만 아파트를 넘겨주셨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어머니 통장을 막내가 관리하고 있는데 잔고가 이상합니다." 송편을 빚던 손으로 상속 서류를 들고 찾아오는 형제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필자는 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가사·상속 사건을 오랫동안 담당했고, 수원가정법원에서는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상속재산분할 사건을 심리했다. 그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상속 분쟁의 씨앗은 대부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이미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명절을 보낸 가족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적어 본다. 상속 분쟁은 '돈'보다 '서운함'에서 시작된다 상속재산분할 사건을 진행하면서 법대에 앉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다투는 대상은 분명 재산이 맞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그 밑에 깔린 진짜 이야기가 들린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형만 챙기셨다", "아버지 병간호는 내가 다 했는데 재산은 똑같이 나누자고 한다", "결혼할 때 누나는 집을 받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쌓인 서운함이 부모님의 부재와 함께 한꺼번에 법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상속재산분할 사건은 판사에게도 쉽지 않은 사건이다. 법률적 쟁점만 놓고 보면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사건도 당사자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치열하게 다툰다.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그 마음까지 판단해 줄 수는 없다.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재산을 나누는 것뿐이다. 법정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쟁점 실무에서 가장 첨예하게 다투어지는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특별수익'이고 다른 하나는 '기여분'이다. 특별수익은 공동상속인 중 누군가가 부모님 생전에 증여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상속분을 미리 받은 것으로 보아 계산에 반영하는 제도다. 문제는 무엇이 특별수익에 해당하는지를 입증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이다. 수십 년 전 결혼 자금으로 건네진 돈, 사업 자금 명목으로 오간 돈, 부모님 명의 계좌에서 조금씩 빠져나간 돈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당사자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금융거래정보 제출명령 등을 통해 오래된 거래내역을 하나하나 추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형제들 사이의 불신은 더욱 깊어진다. 기여분은 부모님을 특별히 부양하거나 재산의 유지·증가에 특별히 기여한 상속인에게 그 몫을 더 인정해 주는 제도다. 그런데 법원은 기여분을 생각보다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함께 살며 병간호를 했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통상의 부양 수준을 넘어서는 '특별한' 기여였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법정에서 "제가 10년 동안 어머니를 모셨습니다"라고 호소하던 상속인이 기여분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부모님이 계실 때 해 둘 수 있는 일 그렇다면 분쟁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재산에 관한 뜻을 분명히 남기시도록 돕는 것이다. 첫째,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다만 유언은 법이 정한 방식을 엄격하게 지켜야 효력이 있다. 가장 흔히 쓰이는 자필증서 유언은 유언자가 전문(全文)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직접 쓰고 날인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유언 전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연월일 중 '일'이 빠졌다거나 주소 기재가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뜻이 담긴 유언장이 효력을 잃는 경우를 법정에서 여러 차례 보았다. 가능하다면 공정증서 유언을 활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둘째, 생전 증여가 있었다면 그 경위와 취지를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 특정 자녀에게 결혼 자금이나 주택 자금을 지원했다면, 그것이 상속분을 미리 준 것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의 지원인지 부모님이 직접 밝혀 두는 것만으로도 훗날의 다툼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셋째, 부양과 간병의 기록을 남겨 두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라면 병원 동행 기록, 간병비 지출 내역, 부모님을 위해 부담한 생활비 내역 등을 평소에 정리해 두는 것이 좋다. 기여분을 주장할 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다. 넷째, 유류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모님이 특정 자녀에게 재산을 몰아주는 유언을 하더라도 다른 자녀들은 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몫, 즉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다. 유류분을 고려하지 않은 재산 설계는 오히려 더 큰 분쟁을 부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다 상속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다. 부모님 앞에서 재산 이야기를 꺼내면 불효처럼 느껴지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욕심쟁이로 비칠까 조심스럽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족은 그 이야기를 미룬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법정에서 처음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얘기하고 듣게 된다. 필자가 판사로 근무할 때 조정이 원만하게 성립된 상속재산분할 사건들을 돌아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부모님이 생전에 자녀들에게 당신의 뜻을 여러 번 이야기해 두셨다는 점이다. 자녀들은 그 뜻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부모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차이가 법정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명절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몇 안 되는 기회다. 올해 추석 밥상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차분히 나눠 보기를 권한다. 상속은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다. 그 메시지가 분쟁의 불씨가 아니라 가족을 이어 주는 끈이 되려면,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 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 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 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설] AI 해킹에 맥없이 뚫린 금융, 고객은 불안하다

은행권에 이어 저축은행과 캐피털사까지 금융권 전반에서 해킹으로 인한 고객 정보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말부터 신한·KB국민·하나·BNK부산은행과 예가람·웰컴저축은행, 현대캐피탈 등 7곳에서 피해가 확인됐다. 우리·NH농협은행과 새마을금고중앙회도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차단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의식해 이재명 대통령도 나서 철저한 조사와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피해 규모와 내용 모두 가볍지 않다. 신한은행에서만 2만5000여명, 예가람저축은행에서 약 4만명의 정보가 빠져나갔다. 특히 신한은행 유출 정보에는 이름과 연락처뿐 아니라 연 소득과 대출 산출 한도, 주민등록번호와 연계정보까지 포함됐다. 이런 금융 정보는 다른 개인정보와 결합되면 보이스피싱이나 명의도용 대출 같은 직접적인 금전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당국과 보안업계는 이번 공격에 인공지능(AI)이 활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AI 에이전트 등을 이용해 여러 금융사를 무작위로 공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국이 공격자 IP를 공유한 뒤 각 금융사가 접속 기록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가 잇따라 확인됐다. 아직 피해를 파악하지 못한 금융사가 더 있을 수 있는 만큼 점검을 서둘러야 한다. 해커가 침투한 곳은 인터넷·모바일뱅킹 같은 핵심 시스템이 아니라 대출모집인용 간편조회 서비스나 직원용 업무지원시스템 같은 부가 시스템이었다. 핵심망 보안에 집중하는 사이 외부와 연결된 주변 시스템 관리에는 허점이 있었던 셈이다. 특히 신한은행은 공격을 받은 지 15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했으며 차단까지 30시간 가까이 걸렸다. 신한은행이 금융위원회의 개인신용정보 보호 실태 점검에서 6년 연속 만점을 받았다는 점은 현행 평가 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런 가운데 최근 금융회사들의 보안 투자도 줄었다. 금융권의 안일한 보안의식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공시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의 지난해 정보보호 투자액은 1537억원으로 전년보다 9.8% 감소했다. 정보기술(IT) 투자에서 정보보호가 차지하는 비중도 8%대에 그쳤다. 은행 8곳이 지난해 편성한 정보보호 예산의 집행률은 69%에 불과했다. 해마다 큰 이익을 내면서도 보안을 '비용'으로만 여겨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우선 금융사들은 고객용과 직원용을 가리지 않고 외부에서 접속 가능한 모든 시스템을 점검해 보안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이번에 공격자 IP 공유가 숨은 피해를 찾는 데 효과를 보인 만큼 금융당국·금융보안원·KISA·경찰·금융사 간 위협정보 실시간 공유 등 공동 대응 체계도 강화해야 한다. 당국은 서류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불시 모의해킹 같은 실전형 점검을 늘리고 취약점 보완이 실제로 이뤄지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내부 전산망을 외부 인터넷과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망분리' 완화 논의도 서둘러야 한다. 이번에 뚫린 곳은 애초에 외부에서 접속하는 서비스였다. 망을 나누는 기존 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금융사가 최신 AI 보안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되, 그만큼 실질적인 보안 책임은 더 무겁게 지워야 한다. AI를 앞세운 공격에는 AI를 활용한 방어로 맞설 수밖에 없다. 핵심망만 지키는 지금의 보안 체계로는 다음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사설] 국민연금 주식 수익률 급락, 리밸런싱 미룬 대가

지난 6월 107.37%에 이르렀던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누적 수익률이 다음 달인 7월에는 60.11%로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7월 말 국민연금 기금 적립금은 1684조1730억원으로 한달 전보다 9.7%(181조4030억원) 감소했다. 국민연금 국내 주식 투자의 이런 결과는 예견된 것이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평가이익으로, 주식 매도로 이익을 실현하지 않으면 숫자상의 이익에 불과하다. 지금도 수익률이 9.7%로 두 자릿수에 가깝지만 이익 실현을 하지 않으면 수익률이 더 떨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리밸런싱(주식 매도로 자산 재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민연금 측은 계속 유예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팔기 시작하면 주가가 크게 조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가는 앞으로 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매도 시기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이익 실현을 계속 미루다가는 상승분을 다 반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재명 정부 들어 국민연금 기금은 주식 부양에 동원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한 올해 국내 주식 비중 목표치는 14.9%였다. 위원회는 목표치를 계속 높여 29.1%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코스피 지수가 폭락하니 수익률이 급감한 것이다. 수익률은 이익을 실현해야 실제의 수익률이 된다. 평가이익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허수일 뿐이다. 지수가 상승할 때 매도해서 수익을 현금화해야 연금 재원이 확대될 수 있다. 계속 보유하고 있는다면 숫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거부는 주가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이다. 그러다 주가가 하향 추세를 그려 1년 전의 숫자로 회귀하면 누가 책임질 건가. 올랐을 때 팔고 떨어지면 다시 저가 매수하는 매매 원칙은 개인만이 아니라 국민연금에도 유효하다. 외국인들은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국민연금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주가 상승기를 외국인들은 잘 활용해 이익을 챙겼다. 주가가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한때의 주가 상승에 따른 최대의 수혜자는 외국인이 될 것이다. 외국인들의 이익은 곧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일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 애초 주가 부양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잘못이다. 적정 투자 비율을 지키며 시장의 흐름을 따르는 정도(正道)를 국민연금은 지켜야 했다. 국민연금은 국내보다는 국외 투자로 돈을 벌어들이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 인위적으로 부양한 주가는 언젠가는 원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국민연금은 평균 이상의 수익을 보고 있는 지금이라도 리밸런싱에 들어가야 한다. 외국인이 매수할 때 매도함으로써 외국인에게 바통을 넘겨야 한다. 그런 다음에 때를 기다려 다시 저가 매수하는 게 투자의 바른 태도다. 주가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계속 높은 투자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가는 영영 매도 시기를 놓칠 수 있다.

[기자수첩] 현실 외면한 '영화적 상상력'

영화 '암살자(들)'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 영화다. 상상력으로 어디까지 역사를 바꿔도 될지 의문이 남았다. 인상적인 장면도 있었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기자들의 고군분투는 같은 기자로서 뭉클했다. 그들은 외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국이 발표한 사실 너머의 진실을 좇았다. 하지만 영화 속 의혹에는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영화는 문세광 외에 또 다른 저격수의 존재를 제기하고, 권력기관이 배후에 있었다는 음모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나 당시 재판부는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에 육 여사가 숨졌다고 판단했다. 영화는 문세광의 권총 입수 경로에도 의문을 제기하지만, 총들은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것이었다. 무엇보다 생중계되는 행사장에서 대통령이 총탄에 맞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이런 일을 계획했다는 가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영화는 정권의 개입을 암시하면서도 기존 수사 결과를 뒤집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의혹을 하나둘 쌓아 올리면 그럴듯한 이야기는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역사적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논란은 극장 밖으로도 번졌다. 박정희기념재단은 제작사의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고발도 이어졌다. 고발이 형사책임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영화 속 묘사를 단순한 각색으로 넘기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크다. 영화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다.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실제 사건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것은 창작자의 자유다. 그러나 실존 인물과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팩션을 표방했다면 영화적 표현과 근거가 부족한 음모론 사이에 선을 그었어야 한다. 도입부에 창작물이라는 안내 문구를 넣었다고 해서 스크린 속에서 역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까지 얻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통해 역사를 배우려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해도 영화는 감독의 해석과 각색을 거친 결과물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역사적 사실을 일일이 검증하기는 어렵다. 스크린에 펼쳐진 장면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적 허구는 실제 사건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는 영화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창작의 자유가 존중받아야 하듯 역사적 사실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 책임을 외면한 채 영화적 상상력만 앞세운다면 팩션은 결국 그럴듯하게 포장된 선동일 뿐이다. [email protected]

[강남視角] 가맹점과 본사 윈윈 구조 만들어야

한국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에 문을 연 'L치킨'이 국내 프랜차이즈의 효시로 꼽힌다. 통째로 굽는 전기구이 통닭이 대세였던 시절, 조각낸 닭에 파우더를 입혀 튀긴 프라이드 치킨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수시간씩 줄을 서야 했고, 그 당시에 번호표까지 나눠줄 정도였다. 사업성을 알아본 단골들의 가맹 문의가 이어지면서 서울 반포점을 시작으로 점포는 한때 400개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반세기. 한국 프랜차이즈는 외식업을 넘어 유통·서비스 등 전 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된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1만3725개에 이른다. 연평균 300개에 가까운 새 브랜드가 생겨난 셈이다. 가맹점만 38만여개다. 프랜차이즈가 자영업 생태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구조가 한몫했다. 가맹본부는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수익이 증가하기 때문에 대다수가 초도가맹금, 로열티를 받지 않거나 최소화해 진입 문턱을 낮추는 대신 공급물품 등에 마진을 붙여 회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예비창업자들은 특별한 기술 없이 낮은 비용으로 손쉽게 개업할 수 있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현재 프랜차이즈 브랜드 10곳 중 약 7곳이 이 같은 구조다. 하지만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심에는 '차액가맹금'이 있다. 가맹본부가 가맹점에 공급하는 원부자재 등 필수품목에서 차액을 남기는 유통마진으로 중요한 수익원이다. 그러나 점주 입장에서는 자신이 얼마의 마진을 부담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품목별로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거나 계약상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본사와 점주 사이의 신뢰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1월 대법원 판결을 받은 한국피자헛 사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본사가 과도한 폭리를 취했느냐가 아니라 차액가맹금을 받을 계약상 근거가 충분했느냐가 핵심이었다. 결국 정보의 비대칭과 불명확한 계약이 본사의 발목을 잡았다. 이 판결이 프랜차이즈 업계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관행은 더 이상 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관련 소송에 휘말린 브랜드가 20여곳에 달해 업계 전반의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 특히 오는 12월 31일 이후 개정된 가맹사업법이 시행되면 브랜드별로 노조나 다름없는 점주 단체가 최대 10개까지 늘어나 차액가맹금이 협상의 핵심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분쟁의 접점도 함께 늘어나면 성장의 의미는 달라진다. 가맹점 확대가 어느 순간 소송대란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랜차이즈 기업가치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피자헛이 패소 이후 직영점과 브랜드를 분리해 110억원에 매각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차액가맹금의 산정 근거와 품목별 마진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점주와 협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외처럼 매출의 일정비율을 받는 로열티 구조로 일원화하는 것이다. 전자는 수십에서 수백 가지에 이르는 품목별 마진을 놓고 본사와 점주단체가 일일이 협의해야 하기 때문에 갈등과 비용이 되레 커질 수 있다. 반면 매출 연동형 로열티는 본사가 점포의 매출을 키울 유인이 커지고, 가맹점 역시 본사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적어도 본사와 점주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지금보다는 이해관계가 훨씬 선명하다. 그동안 프랜차이즈는 수많은 자영업자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제공했고, 누군가에게는 인생 2막을 여는 든든한 동반자가 됐다. 다만 지난 50년이 '가맹점 확대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 가맹점 성공이 곧 본사 성장으로 이어지는 구조, K프랜차이즈가 다음 50년을 위해 다시 세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다. [email protected]

[포럼] SMR로 석화·철강산업 살리자

우리 석유화학과 철강산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글로벌 공급 과잉과 중국 등과의 경쟁 심화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정부에 의해 탄소 다배출·난감축 업종으로 관리되는 등 탄소 배출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요구도 받고 있다. 가격경쟁력과 탄소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해결이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석유화학산업은 원유와 나프타, 천연가스 등 탄화수소를 원료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으로 이들 원료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면 산업의 존립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고 철강도 기존 설비와 공정을 전면 교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4세대 고온가스로 소형모듈원자로(SMR)가 해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석유화학과 철강은 전력은 물론 엄청난 양의 열과 증기가 필요한바, 고온가스로 SMR은 헬륨 냉각재를 이용하여 경수로보다 훨씬 높은 온도의 열을 공급할 수 있다. 일본의 HTTR은 원자로 출구 온도 950도를 달성했고, 일본원자력연구기구(JAEA)는 이 고온열을 수소생산뿐 아니라 화학공장과 철강산업에서의 활용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 원료를 하루아침에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원료를 가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열과 증기부터 무탄소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에 수소생산까지 연결하면 무공해 수소환원제철의 경제적 타당성을 높일 것이다. 이는 원자력산업이 당면한 과제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원자력 입장에서는 SMR과 4세대 원자로 기술을 실제 산업현장에서 실증하고 상용화해야 한다. 세계 각국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2023년 산둥성 스다오완의 HTR-PM의 상업운전을 시작하였고, 일본은 앞서 말한 대로 HTTR에서 950도 고온열과 안전성을 장기간 실증해 오면서 지금은 원자로의 열을 직접 수소생산설비와 연결하는 실증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엑스에너지가 Xe-100이라는 고온가스 SMR을 다우(Dow)의 텍사스 시드리프트 화학단지에 설치하기 위하여 정부에 이미 인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이제 원전은 발전소 부지만이 아니라 화학공장에 설치되어 전력과 공정에너지를 동시 공급하는 새로운 모델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정부가 SMR 민관협의체를 발족하기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고온가스로 SMR에 대해서도 논의되길 기대한다. 논의는 새로운 원자로를 더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석유화학·철강·정유 등과 결합하여 새로운 산업에너지 시스템을 만들고 더 나아가 해외 수출 기반을 확대하는 데에 중점을 두길 기대한다. 우리의 울산과 여수, 대산에는 대규모 석유화학단지가 있고 포항과 광양에는 세계적 철강 단지가 있다. 한 지역에 대규모 열.수소 수요가 집중돼 고온가스로 SMR을 산업단지와 연계해 실증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국내 실증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철강과 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이 처한 이중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열교환기, 증기공급시스템, 수소생산설비, 고온소재, 엔지니어링과 운영기술을 함께 묶은 '산업 에너지 패키지' 수출 기반을 넓힐 수도 있다. 다소 뒤처진 우리의 고온가스로 SMR 개발과 상용화가 앞당겨지길 기대한다.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

[fn광장] AI 시대, 대학의 역할

20세기 산업화 사회에는 대학이 지식을 만들어 전수했다. 그러나 대학이 지식을 독점한 시대는 끝났다. 2026년, 인공지능(AI) 시대에는 기계가 인간의 전유 영역이었던 지식 노동을 대신 하고 있다.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그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현실과 가상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면서 지식의 실체마저 모호해지고 있다. 대학의 역할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순간이다. 담아내는 지식의 양으로 대학을 평가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과거에 대학의 브랜드 파워와 학위증이 보증하던 능력도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학뿐 아니라 전 세계 대학이 마주한 현실이다. 지식의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다. 누가 세상을 바꾸는 연구를 내어놓는가가 승부의 관건이다. 대학의 졸업생들이 전수받은 지식으로 딛고 올라서던 첫 계단도 급격히 좁아졌다. 학벌이 무너진 것이 아니고, 학벌이 향하던 목적지가 흔들리고 있다. 목적지의 좌표를 찾지 못하면 대학은 무너진다. 산업화 시대에는 국가와 기업이 미래를 이끌었지만, AI 시대에는 대학이 미래 지식의 새 기준을 설계해야 한다. 대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연구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연구를 해야 한다. 만들어진 지식을 가르치는 대학을 넘어 미래를 만들고 열어가는 지식창조 인재를 길러야 한다. 변화에는 모멘텀이 중요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AI가 인류의 지식 체계를 흔드는 위기의 시간인 지금이 곧 변화와 기회의 시간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의 나비효과를 만든다. 대학 스스로가 변화의 시대에 답해야 한다. 첫째, 대학은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연구에 도전해야 한다. 최소 10년을 내다보고, 가장 큰 문제에 먼저 투자해야 한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에 해결해야 할 미지의 연구 분야는 널려 있다. 해마다 교수와 연구자의 실적을 확인하고 결과를 요구하는 구조에서는 10년이 걸리는 어려운 문제에 손을 대기 어렵다. 교수들이 큰 문제를 피해 간 것이 아니다. 제도가 큰 문제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를 손봐야 한다. 둘째, 대학은 두려움 없이 실패를 무릅쓸 수 있는 연구에 도전해야 한다. 성공이 보장된 안전한 연구에 대한 유혹과 보상은 달콤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운 연구가 일단 성공하면, 그 성과는 훨씬 더 몸에 유익하고 그 자체가 지식 체계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 국가는 정치적 판단의 이유로, 기업은 눈앞의 이익의 이유로 쉽게 하기 힘든 어려운 연구를 대학의 연구자가 두려움 없이 실패를 감수하며 도전해야 한다. 대학은 이런 연구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 두려움 없이 밀어붙이는 연구에 안전망이 보장돼야 한다. 셋째, 대학이 교수와 연구자를 평가하는 방식에 새 기준이 요구된다. 하나의 잣대로 모든 학문을 재지 말아야 한다. 글로벌 대학평가 기준이 문제라면, 이를 극복할 이 시대의 새 기준을 만드는 결기가 필요하다. 인용 색인이 연구 성과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 단행본과 비평, 국내 학술지와 정책 보고서, 특허와 기술이전, 창업으로 학문적 기여를 쌓아 온 분야도 있다. 같은 노력에 차등적 보상이 돌아가는 구조는 오래갈 수 없다. 기존 지표로 쌓아 온 성과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기존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연구 성과들이 보상받는 방향으로 보완하는 새 기준이 필요하다. 결정의 권한은 연구 현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 대학이 세운 기준을 세계가 따라오게 해야 한다. 넷째, 대학은 국가와 기업 연구비 수익 모두를 연구에 돌려줘야 한다. 대학 살림살이의 어려움을 이유로 다른 목적에 전용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의 연구자에게 투명하게 재투자해 연구 생태계의 건강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이 연구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교수, 대학원생, 학부생 연구자가 대학의 연구 체계를 지배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연구의 소중한 성과들이 국가와 기업의 미래를 이끌어 가야 한다. 대학이 스스로 답하지 못하면 시장이 바로 답할 것이다. 지식 생태계의 와해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 다음 세대의 미래가 함께 걸린 일이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AI가 물리적 시간의 개념을 바꾸고 있다. 그래서 더욱 시간이 없다. 변화의 결정적인 순간인 지금 바로 답하지 못하면, 대학은 영원히 답할 기회를 놓칠 것이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