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윤·양준모 '니벨룽의 반지' 4부작 포문 "에너지 5배 들지만 바그너, 마력 있죠"[인터뷰]
바그너의 4부작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제1편 '라인의 황금'
[파이낸셜뉴스] "연습을 시작할 때는 건강했는데 몇 주가 지나면서 점점 피폐해져요. 집에서 분장을 지우다 보면 '내가 왜 또 이러고 있나' 싶죠. 그런데 무대서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 '그래, 이것 때문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그너에게는 그런 마약 같은 힘이 있어요."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은 바그너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고통과 희열을 이렇게 설명했다. 바리톤 양준모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는 "정말 사랑하지만 저를 너무너무 힘들게 한 애증의 작품"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번갈아 연기하는 인물은 바그너 4부작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제1편 '라인의 황금'의 알베리히.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거대한 비극을 촉발하는 난쟁이다.
국립오페라단이 오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라인의 황금'을 선보이며 국내 오페라계에 길이 남을 뜻깊은 도전에 나선다. 니벨룽의 반지' 전막 초연 150주년을 맞아 시작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첫 무대로, 2029년까지 네 작품을 차례로 무대에 올린다.
알베리히 역을 나눠 맡은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과 바리톤 양준모는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바그너 작품에 출연하며 깊이 있는 해석을 쌓아왔다. 독일 쾰른오페라에서 23년간 종신 솔리스트로 활동한 사무엘 윤은 바그너 작품만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2012년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타이틀롤을 맡은 뒤 4년간 주역으로 초청받으며 바그너 전문 성악가로 명성을 쌓았다. 바리톤 양준모는 뮌헨 ARD 국제 콩쿠르에서 1위와 청중상을,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의 바그너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니벨룽의 반지'는 바그너가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서사시를 바탕으로 26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라인의 황금'에서 시작해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진다. '링 사이클'로 불리는 네 작품의 출발점에는 사랑을 갈구하다 라인강의 처녀들에게 조롱당한 알베리히가 있다. 그는 라인강의 황금을 빼앗아 절대 권력을 주는 반지를 만든다. 이 반지를 둘러싸고 신과 거인,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파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무엘 윤은 개막을 앞두고 만나 "알베리히는 '링'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며 "특히 '라인의 황금'에서는 짧은 시간에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이 알베리히를 처음 만났던 과정은 사뭇 달랐다. 양준모에게는 절박했던 시절 찾아온 기회였다. 그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던 때 오스트리아의 작은 극장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를 했다. 그때 연출가가 '라인의 황금' 오디션을 제안했다"며 "당시에는 알베리히가 어떤 역할인지도 잘 몰랐다"고 돌아봤다.
혼자 악보를 공부해 연습에 들어갔지만 여정은 녹록치 않았다. 양준모는 "첫 연습에서 지휘자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며 "그때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의 악보는 지금도 갖고 있다. 그는 "김칫국물도 묻어 있고 찢어진 곳에는 테이프도 붙어 있다. 새로 하나 사라고 해도 못 사겠더라"고 했다.
사무엘 윤에게 알베리히는 바그너에서 벗어나고 싶던 순간 찾아온 캐릭터로, 커리어 전환점이 됐다. 그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정말 많이 했다. 계속 같은 배역의 요청이 들어오니까 어느 순간에는 도망가고 싶었다"며 "알베리히 제안을 받고 악보를 봤을 때도 처음에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6년 이 역을 맡은 뒤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바그너를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오히려 알베리히를 통해 뚫렸다. 제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오랜 경험에도 알베리히는 만만치 않은 배역이다. 넓은 음역과 격렬한 감정 표현뿐 아니라 독일어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무엘 윤은 독일 무대에서 한국 성악가에게 알베리히를 쉽게 맡기지 않는 이유로 언어의 장벽을 꼽았다. 그는 "독일어의 감각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독일어는 자음이 단어를 구별하고 문장의 뜻을 또렷하게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바그너 오페라는 오케스트라 위로 긴 대사와 격렬한 감정을 전달해야 하므로, 자음을 명확하게 발음하는 일이 특히나 중요하다.
양준모는 "침을 뱉듯이 자음을 밖으로 보내야 한다"며 "'더 뱉어라', '안 들린다'는 지적을 받는다"고 말했다. 사무엘 윤 역시 바이로이트에서 "몇 시간씩 연습하고 쉬러 가는데도 음악 코치들이 붙잡고 발음을 이야기했다. 꿈에 나타날 정도였다"고 돌아봤다.
흔히 알베리히 캐릭터는 '바그너의 무덤'으로 통한다. 양준모는 "알베리히는 웃을 때도 거칠게 웃고 소리를 뱉어내야 한다"며 "한 번 부르고 나면 성대를 칼로 긁은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사무엘 윤은 "다른 오페라에 쏟는 에너지의 다섯 배는 든다고 느낀다"고 했다. "많이 해봤기 때문에 지혜롭게 끝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정말 어렵다"며 "그만큼 관객도 흠뻑 빠지게 해드리고 싶다"며 열정을 내비쳤다.
한편 이번 공연은 2025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 유연한 상상력과 동시대적 감각을 선보인 로렌조 피오로니가 연출을 맡아 정형화된 신화의 틀을 깨부순다. 연출가는 바그너의 신화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비추는 '돋보기'로 정의하며 부동산, 대출과 계약, 노동 착취, 젊음에 대한 집착 등 현대 사회의 내밀한 욕망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또 무대 위 배치된 '라이브 카메라'를 활용해 인물의 내면과 권력의 민낯을 보다 가까이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파격의 연출을 선보일 예정이다.
[email protected] 신진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