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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객주] 조선말 민초 삶 그린 ‘생활사 박물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1.16 08:58

수정 2014.11.07 19:44


■객주(客主·전9권)(김주영 지음/문이당)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삶과 애환을 맛깔스러운 우리말로 요리해놓은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客主)’(전9권)가 새롭게 단장하고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지난 8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초판을 내기 시작해 84년 완간된 ‘객주’는 20년이 지난 2003년 새해 벽두에 문이당으로 출판사를 옮겨, 페이지마다 생소한 단어에 각주를 달고, 난해한 한자성어는 풀어쓰는 등 한글세대를 위해 보다 읽기 편하도록 편집했다.

한국문학사의 빛나는 업적을 기록한 김주영의 ‘객주’에 대한 서평과 함께 한국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편집자주)

‘객주’는 19세기 말의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하소설이다. 시기상으로는 조선 왕조가 명운을 다하고 서서히 외세의 침탈에 놓이기 시작한 때다.

당시 조선은 한 세기 전의 영·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끝으로 갈수록 제도 자체의 모순이 심화된 나머지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이를 개혁해나가야 할 지도층은 권력투쟁과 탐욕에 빠져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순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체계였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여 선비가 중심이 된 이 제도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명분을 중시하다 실질적인 삶에 대한 통찰을 잃어갔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반 지위를 돈으로 사는 일마저 빈번해져서 세금과 군역 등을 담당할 양민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보부상들이라는 것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제도의 모순을 가장 직접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상인들의 시각으로 당대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부상들의 입을 통해 당대의 지배계층은 물론이고, 그들과 결탁하여 갖가지 비리를 일삼는 부정한 세력이 거침없이 비판당한다. 물론 보부상들의 언어는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삶에서 직접 체득한 지혜는 그들의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언어에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부여한다. 게다가 보부상들은 서울의 시전상인으로 대변되는 정주(定住) 상인이 아니다. 그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심지어는 국경 너머까지 나아가 외국상인과 접촉하기를 마다 않는다. 이들의 이러한 존재조건은 다른 어느 계층보다도 빨리 당대의 변화와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정보력을 안겨주었다. 지배계층이 기득권에만 눈이 멀어 있을 때, 이들 유목민 성향의 일선 영업사원들은 각자가 취합한 정보를 모아 세계에 대한 전망을 획득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객주’의 뛰어남은 이런 정치적 의미에만 있지 않다. 이 소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그런 비판의식을 감싸고 있는 민중들의 구전언어의 생생함과 동시에 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풀어지며 이루는 극적인 상황 전개라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이 오고가는 무대가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의 공간에도 온갖 음모와 술수, 배신이 자리한다. 작가는 그것을 통해 인간 존재의 어두운 속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우리 삶의 어찌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운명이다. 하지만 그 운명은 수동적인 체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삶을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동료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기도 하며, 지아비 가족의 행복을 위해 볼모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하는 천봉삼과 조성준, 유필호와 이용익, 그리고 월이 등은 모두 그런 삶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인물들이다.

보부상들의 그런 세계는 성(性)을 묘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들의 성은 현대인들의 부풀려진 욕망보다는 현실의 삶에 더 밀착되어 있다. 그렇다고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남성 우위의 19세기 사회에서 그들의 성에 때로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폭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은 엄연한 생의 자발적인 선택 과정이다. 그래서 ‘객주’의 성은 자연스럽고 건강하며 거침이 없다. 우리 문학 사상 가장 매력적인 잔치 가운데 하나일 이 진경(珍景)의 에로티시즘은 결국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을 발산하는 중요한 계기로 자리잡는다. 과장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인간존재와 삶의 이러한 적나라함이 이 작품을 밀고 나가는 근원적인 힘이다.

그 힘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부상들의 언어를 통해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관념에 물들지 않은 그들의 언어는 생활 그 자체다. 그래서 거기에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일 때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기운이 ‘객주’의 해학을 낳는다. 우리 고전이나 민요 혹은 판소리에서 빠지지 않고 발견되는 이 골계미(滑稽美)가 전통적인 가락과 결합하려 아주 리드미컬한 문장을 만든다. 격하게 굽이치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가빠졌다 늦춰지는 사랑의 호흡처럼, 가득 찼다 비워지는 국토의 들판처럼, 보부상들의 민중언어는 대자연의 순환을 닮는다.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독서가 지루해지지 않는 것은 그 언어가 바로 우리들의 살과 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언어는 작가의 발로 뛰는 치밀한 고증에 힘입어 구체성을 얻는다. 장터와 같은 상거래 현장은 물론이고, 당대의 습속, 거주공간, 복식, 심지어는 규방과 여성들의 물품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홀한 것이 없다. 마치 잘 복원된 한 시대의 박물관을 들여다보는 듯한 생생함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건대, 아마도 이 소설이 없었다면 그보다 스무 해쯤 뒤에 역시 보부상들의 세계를 무대로 한 ‘상도’가 쉽사리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981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1984년 완간을 한 이 작품이 다듬어진 개정판으로 다시 선을 보이게 된 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변혁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실(實)’의 정신과 세계를 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철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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