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위험한‘경제 국수주의’/해럴드 제임스

송경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4.02 14:40

수정 2014.11.06 08:26



새뮤얼 존슨은 애국심을 ‘무뢰한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칭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점증하는 경제 국수주의, 때때로 완곡한 표현으로 ‘경제 애국주의’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현재 경제 애국주의는 전에 없이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두바이 업체가 미국 항만을 인수한다는 계획에 대한 대중의 거센 반대는 미국 정부에 큰 충격을 줬다. 폴란드에서는 포퓰리스트들의 반대로 외국인들의 (폴란드) 은행 소유가 난관에 부닥쳤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력회사인 에넬이 프랑스 유틸리티 업체들을 합병하는 것을 막고 있다. 프랑스는 또 인도 철강 재벌이 좌지우지하는 네덜란드 업체(미탈스틸)가 룩셈부르크에 기반을 둔 철강회사인 아르셀러를 인수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유럽 정부들과 함께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불운한 인수합병가들을 옹호하는 이들은 20세기 최악의 순간에 뿜어져 나왔던 불길한 냄새가 다시 퍼지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분노한 한 이탈리아 장관은 새로운 포퓰리스트 국수주의가 마치 ‘1914년 8월(1914년 8월4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역주)’과 같은 시나리오로 발호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보다 더 유사한 일은 1930년대에 일어났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해인 1933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국가 자긍심’에 대한 항변을 내놨다.

1914년과 1933년의 유사성은 현재의 논란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안보에 대한 우려가 보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항만을 영국 업체가 소유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우려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공포는 두바이가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리즘의 통로가 될 지 모른다는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제 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각국 정부가 경제를 권력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심화됨에 따라 국제 관계가 뒤틀렸다는 점도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랑스가 독일 금융시장을 공격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1911년 모로코와 외교적 긴장을 불렀다. 1930년대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이런 종류의 기술들을 자국 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일본의 에너지 (특히 석유)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통제하려 했다.

미국 안보에 관한 우려가 고조된 가장 명백한 이유는 2001년 9월 테러공격 이후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럽이 전전긍긍하며 보호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서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

유럽의 경우 두 가지 대조적인 설명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새로운 우려가 ‘심리적 감정 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현상에 따른 것이란 설명이다. 프랑스와 폴란드처럼 국가의 쇠락을 우려하고 있는 국민들이 비난의 대상을 나라 밖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국제 자본’이라는 사악한 힘으로 몰아세웠던 포퓰리스트의 반응에는 분명 이같은 정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는 현대에 와서 세계는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 국가 안보와 또 실제로 국가 정체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설명으로 변했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이같은 공포가 실제 문제에서 퍼져나왔다는 것이다. 노르웨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현대 선진 산업국가들의 경제성장은 여전히 에너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공해 또는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부분 나라들은 자국 내에 에너지 설비를 확충하는 것을 게을리 했다.

이같은 취약함은 지난 1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줄였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가스 공급 감축은 중·서부 유럽에 대한 공급 감축으로 귀결됐다.

그 일로 폴란드인들이 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폴란드인들은 포퓰리스트 우익 정권을 압박해 경제적 국수주의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서유럽인들은 배전 중단과 광범위한 단전을 포함한 그들 고유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배전 중단에 직면한 이탈리아 회사가 이탈리아 소비자를 택하는 대신 프랑스로의 전력 공급 중단을 더 선호하지 않겠는가.

경제적 국수주의에 뿌리를 둔 이 두 가지 시나리오는, 하나는 비합리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지만 기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가 틀린 양자 택일의 시나리오가 아닌 두 가지가 서로 얽히고 설킨 반응에 대한 설명이다. 공포가 더 논리적일수록 그 공포는 정치 도구로 더 잘 활용될 수 있다.

공포는 국가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정치인들은 이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자신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잠재적인 문제들을 집어내고 경쟁이 국가라는 영역 안에서만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을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

특히 현대의 한 정치인(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역주)은 에너지 공급과 관련한 불안감을 새로운 정치적 비전의 중심에 놓는 데 효율적인 면을 보여왔다. 블라디미르 푸틴에 따르면 에너지 통제와 보호에 대한 책임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간섭을 정당화한다.

푸틴의 비전은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의 결과로 확실하게 정당화됐다. 그때부터 푸틴은 정치화한 자신의 에너지 비전을 러시아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삼아왔다. 이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렇지만 푸틴이 러시아에서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에서도 모방을 부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경제적 국수주의로부터 비롯된 규제가 강요된 시장에서는 효율성이 사라진 것에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걱정스러운 점은 시장 붕괴나 조작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이같은 붕괴를 막기보다는 붕괴를 부를 가능성이 더 높은 행동을 요구토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는 결국에는 마비로 귀결되는 더 높은 안보 요구를 부른다.

정리= dympna@fnnews.com 송경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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