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국경이 사라진다] 국제기준 조기도입국 필리핀

【마닐라(필리핀)=안상미기자】 필리핀은 2005년에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했다. 한국과 같이 미국 회계기준에 기초한 현지 회계기준인 P-GAAP(Philippines-Generally Accepted Accounting Practices)에서 유럽 회계 기준에 기초한 IFRS로의 전면 이행이었다.
경제 규모는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초부터 유럽회계기준에 기초했던 싱가포르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IFRS로의 전면 이행을 위해 감독당국 차원에서 용역을 맡기고 오랜기간 이행 조정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필리핀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필리핀 금융 중심지인 메트로 마닐라 마카티 지구에서 현지 회계법인과 기업 재무관리자들로부터 IFRS 도입에 따른 변화와 어려움을 들어봤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점진적 적용 과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필리핀의 IFRS 도입은 ‘진행중’이었다.
■IFRS 도입, 선택이 아니라 필수
한국이 2011년이 돼서야 IFRS를 전면 도입하는 것을 감안하면 2005년에 전면 시행했던 필리핀은 훨씬 빠르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도입대상은 증시에 상장됐거나 상장 준비중인 기업, 은행·보험·증권은 물론 연금과 뮤추얼 펀드까지 포함한 모든 금융기관, 이외에 지난 2004년 기준으로 자산이 300만달러 이상인 기업. 사실상 비상장 중소기업을 제외한 전면 시행이다.
시기적으로나 적용대상으로나 선진국 수준만큼 재빨리 움직인 것에 대해 필리핀에서는 ‘선택’이 아니라 경제 생존을 위한 ‘필수’였다고 평가했다.
언스트 앤 영(E&Y) 필리핀 법인의 윌슨 P 탄 파트너는 “필리핀 경제 발전에 있어서 외국인 투자는 절실했고 외채 또한 많았다”며 “투자 결정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재무보고서에 대한 투명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게 위해 IFRS 도입은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내에서는 물론 외부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것은 필리핀 경제나 산업 환경에 맞게 점진적으로 도입했다는 점과 회계사는 물론 기업 재무담당자와 일반투자자들도 IFRS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많은 토론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또 빠른 IFRS 도입으로 필리핀 공인회계사들의 활동 범위도 가깝게는 싱가포르에서부터 멀리는 유럽까지 확대됐다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였다.
■도입 첫 해, 회계보고서 무더기 지각
IFRS를 전면 도입하고 첫 연간 회계 보고서가 제출돼야 했던 2006년 봄. 기한을 지키지 못한 무더기 지각 제출 사태가 일어났다.
윌슨 파트너는 이전보다 몇 배나 ‘두꺼운’ 회계보고서를 준비해야 했다는 말로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당시 많은 회사들의 회계 보고서가 기한을 넘어 제출됐다”며 “회사 재무 상황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은 사항을 기재해야 했던 것은 물론 원칙 기준의 IFRS를 세세한 부문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했다”고 떠올렸다.
또 IFRS는 장부가가 아닌 공정가치(Fare Value)를 적용한다. 부동산이나 주식, 물가 변동폭이 큰 신흥시장의 입장에서는 이와 함께 기업가치가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했다.
KPMG 필리핀 법인의 최고경영자(CEO)인 로베르토 G 마나밧 대표는 “한 예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지분에 대한 평가만을 생각해도 필리핀같은 액티브한 마켓에서의 시장 가치 산정은 그때그때에 따라 변동폭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입장에서는 전면 도입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국제적인 시각에서는 런던의 IFRS의 기준을 변경하거나 예외로 두는 조항이 너무 많다는 비판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필리핀 경제에서 제조업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융기관들에 대한 일종의 ‘특혜’가 문제가 됐다. 특히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이 매년 크게 늘면서 마닐라 시내 어느 골목을 가도 은행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회계 감시는 적절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필리핀은 현재 은행들에 대해서는 지급이 이행되지 않은 손실은 일정기간 나눠 계정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등 일부 예외 조항을 두고 있으며 연금이나 외환, 리스 관련 조항도 추가로 조정했다.
■진출 한국 기업, 회계 기준 조정 때마다 애먹어
한국은 필리핀 직접투자 국가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많은 기업들이 진출해있다. 1970년대 진출한 한진중공업을 비롯해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인터내셔널, 한국전력 등이 있으며 필리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필리핀 현지 기업보다도 더 크다. 현지 상장 기업은 없다.
진출형태는 대부분 단독법인. 따라서 회계기준도 당연히 IFRS를 적용한다.
한 현지 법인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필리핀 현지 회계 법인에 재무보고서 작성을 맡긴다 해도 이전보다 보고할 사항이 늘면서 준비과정이 길어졌다”며 “이후로도 정보 공개 범위가 점차 늘거나 IFRS에 가깝게 수정될 때마다 기업 입장에서는 애를 먹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필리핀과 달리 한국 본사는 IFRS를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본사와의 현금 흐름도 다시 페소로 환산해 2개의 장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이 사이에 실제 재무 정보가 아니라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또 여기서 진출한 한국기업의 희비를 가른 것은 처음 IFRS 도입시 기능통화를 어떻게 선정했는가이다.
한전 관계사인 켑코-이리잔과 케필코가 딱 그런 예다. 켑코-이리잔은 페소, 케필코는 달러를 기능통화로 조정했다. 지난해부터 달러는 약세를 보이고 페소는 강세를 보이며 이들의 환산 손익 규모가 달라졌다.
한전 필리핀 자회사인 켑코-이리잔 현지 회계담당자인 제인 T 파그카리나완은 “처음 IFRS체제로 전환할 때 의무적으로 기능통화를 정해야 했는데 켑코의 경우 페소였다”며 “현재 페소가 강세를 보이며 이득이 됐다”고 설명했다.
/hug@fnnews.com안상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