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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가 만난 아트人] (26) 한국 추상미술 대표작가 정창섭 화백

▲ 현재 노환으로 병원에서 투병 중인 정창섭 화백은 한국추상미술 대표작가로 꼽힌다.

아무 형태 없이 절제된 화면, 누런색, 검정, 팥죽색 등 세월이 곰삭은 색감 앞에 서니 모든 소음이 멈춰진 절대적인 정적의 세계에 빠져든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채로 범벅된 오늘날 그의 작품은 촌스러운 듯 조용하지만 마음의 찌꺼기마저 가라앉을 수 없는 고요함으로 공간을 장악한다.

한국 추상미술 대표작가로 꼽히는 정창섭 화백(83)의 작품이다. 해방 후 국내에서 교육 받고 자란 미술 1세대 화가로 한국적 전통의 종이와 미감을 접목한 추상미술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다. 앵포르멜에서 시작하여 모노크롬을 거쳐 닥종이를 사용한 '닥' '묵고' 등 한국 고유의 전통적 울림을 내포한 작품들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펼쳐왔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등 이질적 개념이 합치되는 '물아합의'의 세계를 추구했다.

■평생 동반자 종이를 만나다

식민지 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았던 선배 화가들과 달리 정창섭은 전후의 불안과 위기의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던 1950년대 후반, 당시 신세대 작가들의 저항과 도전정신에 동조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국적인 추상미술은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그의 화두였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기름진 유화기법과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체질을 깨닫고 마치 동양의 수묵처럼 엷게 번지고 스며드는 자연주의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그에게 일대기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서 종이, 한지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

"종이와 만나기 전에는 유채작업을 했는데 유채의 그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것이 싫어서 테페핀유를 아주 많이 섞어 쓰곤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한지와 만났는데 그때 그 느낌은 요걸 한 번 써보자가 아니라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한지와 만나자마자 그것에 몰두하기 시작했지요."

유화의 기름지고 끈적이는 성질이 불편했던 그는 1970년대 '귀'연작으로 한국의 전통적 재료인 종이로 회귀한다. 화선지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그 위에 먹물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얼룩을 남기는 '귀'는 한옥의 창호지 문이나 창문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정 화백은 문, 창문, 벽, 바닥, 천장 등 종이로 둘러싸인 전통 한옥에서 성장한 유년기의 경험이 종이와의 운명적 만남을 결정지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에게 한지는 한국인의 삶과 밀착된 전통적 생활방식이자 보편적인 민족성을 지닌 재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한지, 닥의 고유한 생명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 정창섭 화백의 화업 60여년을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닥'과의 대화…침묵의 세계로

1980년대 종이에서 한지의 원료인 닥을 주재료로 '닥' 연작을 시작한다. 누르스름하고 미묘한 종이 결이 인상적인 '닥' 연작. 닥반죽을 올려 손으로 이리저리 펴고 매만지면서 만들어낸 섬세한 주름은 산이 되고 골짜기가 굽이치는 강줄기나 대지 위에 새겨진 능선을 담은 거대한 자연의 풍경을 담아낸다. 작가의 숨결과 혼이 닥이라는 재료와 하나로 동화되는 경지, 그것이 정창섭이 지향하는 물아합일의 세계다.

"나의 닥 작업은 장작불을 지펴 온도를 가늠하며 도자기를 구워내는 도공처럼 나를 잊어버린 경지에서 잔잔한 행위의 잔상들을 통해 내 마음에 번지는 내밀한 형상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삶의 허물을 벗듯, 시간속에 동화된 화강암 표면처럼 모든 흔적과 얼룩과 우연을 통해 '물질' '시간' '자아' 그리고 '자연'을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인 것이다."

'침묵은 작품의 전부다.' 그의 마지막 연작 '묵고'는 정 화백의 대표작이다. 묵고 연작은 1990년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닥종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좌우대칭의 엄격한 면의 분할과 구획, 그리고 단단하고 균일하게 다듬어진 마티에르로 인해 팽팽한 평면성이 긴장감을 더한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색의 사용이다. 닥을 물에 푼 상태에서 미리 염색했다. 그래서일까. 내면으로 침잠하며 미묘한 깊이의 울림을 전달하는 침묵의 색채가 빚어졌다.

그는 '은둔의 화가'로도 불린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회 출신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로 30여년간 재직하면서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공방'(239×129㎝)으로 특선하며 화단에 등단한 지 60여년, 현재 노환으로 투병 중인 정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이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8월 3일∼10월 17일)에서 열리고 있다.

주로 상업화랑에서 전시해왔던 정 화백의 이번 개인전은 국·공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최초이자 최대 회고전이다. 초기 큐비즘 화풍이 보이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표작 67점이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순령 큐레이터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자생성 모색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심화된 그의 작품을 통해 한 예술가의 고뇌와 깊이,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사의 굴곡을 조망해보고자 한다"며 "한국적 미술을 창조하고 전통에 대한 자각을 당대의 정신 속에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현대미술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전시 설명회와 닥종이 체험 교육 등 다양한 관련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14일에는 음악과 미술의 만남으로 국악인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다. 전시 설명회는 평일 오후 2시와 4시(주말 오후 6시)에 진행된다. 관람료 3000원.(02)2188-6000

/hyun@fnnews.com박현주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