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의 워싱턴 프리즘] 어디나 흔한 정치의 위선](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13/11/19/201311191707572445_l.jpg)
미국 정치에 가장 흔한 것은? 답은 위선(hypocrisy). 혹은 안면 몰수, 안면 바꾸기. 미국의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 진 힐리의 글을 읽다가 생각해 본 것이다. 그는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와 관련된 정치인들의 안면 바꾸기를 이렇게 꼬집었다. "이 동네(워싱턴)에서 위선은 더운 공기만큼 흔하다." 필리버스터는 미국 고교생들이 아는 정치 관련 단어 1위일 정도로 친숙(?)하다. '20여시간 발언' 등 드라마틱한 보도 때문일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미국 상원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하지만 위선 운운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최근 일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공화당이 민주당 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특히 연방법관 인준안 표류 사태가 벌어지자 민주당이 들고 일어났다. 다수결 원리를 침해하는 필리버스터는 위헌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부시 대통령 재임 시는 전세가 역전됐다. 민주당의 방해로 연방판사의 임명 지연, 실패가 되풀이되자 공화당이 발끈했다. 과거 민주당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돌변한 민주당은 상원의 영혼(soul), 소수파 보호, 표현의 자유 등 필리버스터 찬성 깃발로 바꿔 들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대의 풍경은 짐작대로다. 다시 공수 교대. 정부 폐쇄 전 예산안 조정에 실패한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총무는 필리버스터 제한을 위한 상원 규칙 개정을 언급했다. 공화당 미치 매코넬 원내총무는 '공갈 정치'라며 펄쩍 뛰었다. 과거 필리버스터 폐지에 앞장섰던 그는 기자들의 추궁에 멋쩍게 답했다. "아, 그거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Boy, that was a dumb idea)."
비단 정치인들만이 아니다. 세계적 명성의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도 같은 대열에 낀다. NYT는 1995년 사설에서 '민주주의를 망치는 낡은 제도'인 필리버스터를 없앨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4년에는 '정부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중심'에 필리버스터가 있다고 그의 유용성을 재발견한다. 1998년 칼럼을 통해 필리버스터의 '반 다수결' 속성을 비난한 WP 역시 2005년 '필리버스터 폐지는 급진적 조치로서 소수파 보호에 재앙'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나마 NYT는 '과거의 잘못된 판단'을 고백하며 그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공화당도 언젠가 처지가 바뀔 때 상원규칙의 보호가 필요함을 깨달을 것이다." 훈훈한 얘기는 아니어도 정치인보다는 덜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을 놓고 한국 정치권이 또 싸우는 모양이다. 새누리당은 과거 박근혜 대표까지 적극 나서 통과시킨 법을 무대가 바뀌자마자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국회를 마비시킬' 정도의 무기를 만들어 놓고도, 이를 팽개친 채 밖으로만 도는 민주당도 안면 두께는 피장파장이다. 정치인의 위선은 동서양 어디나 흔한 듯하다.
미국의 필리버스터 위헌 논쟁은 수십년째 지속 중이다. 찬반 어느 쪽도 결정타가 없지만 일단 위헌으로 폐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 상원을 강력한 상원으로 만드는 무기가 필리버스터임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필리버스터가 아니라 그 배후의 극단적 당파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마디로 제도 자체보다 남용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국회법의 위헌성을 논할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 제도는 미국과 상당히 다르다. 문제가 된 국회법은 쟁점 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 제도가 핵심이다. '재적 5분의 3의 찬성'은 미국처럼 토론 종결을 위해 필요하다. 모든 법안통과를 위해 5분의 3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따라서 과장되거나 여론 호도용이다. 특히 미국 상원 의사규칙 개정은 더 가중된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하는 점이 가장 문제시된다. 우리 국회법에는 이런 규정이 없다.
정작 이상한 일은 따로 있다. 국회가 도입했다는 초강력 무기는 소문만 들었지 실제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동물국회, 식물국회 대신 차라리 치열한, 무제한의 토론을 보고 싶다. 법 명칭은 이상하지만 어쨌든 멱살잡이도, 장외투쟁도 선진 국회와는 거리가 멀다.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져야 남용 여부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번이라도 쏴봐야 대포인지 소총인지 알 게 아닌가.노동일 경희대 교수·美시러큐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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