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386이라는 '괴물'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04 17:09

수정 2019.09.04 19:30

진보꼰대등 온갖 비아냥 난무
괴물과 싸우다 괴물 되지마라
철학자 니체의 경고 되새기길
[정순민 칼럼] 386이라는 '괴물'
나는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니 이른바 86세대다. 30대엔 386, 40대엔 486, 50대인 지금은 586으로 불린다. 연식이 자꾸 늘어나고 있지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산이라는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다. 지금 문재인정부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 중에도 공교롭게 586이 많다. 통계에 따르면 문재인정부 장차관의 63%, 청와대 수석의 70%가 586이다. 또 지난 2016년 총선에 출마한 586의 비율도 83%나 된다.


이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담은 '386세대유감'이라는 책이 얼마 전 나왔다. 저자들은 1978년부터 1987년 사이에 태어난 386의 후배세대들이다. 이들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88만원 세대, N포 세대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된 세대로, 사회 전 분야를 장악한 386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저주받은 세대'라고 스스로를 자조한다. 생물학적 나이로 따지면 이제 막 서른을 넘겼거나 마흔 줄에 접어든 비교적 젊은 연령대다.

온라인 공간으로 들어가보면 386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차고 넘친다. 기득권 아저씨들, 정의로운 척하는 꼰대 집단, 사다리를 걷어찬 세대 같은 비난은 차라리 애교 수준에 가깝다. '꿀 빨아먹고 헬조선 만든 세대'라는 악의에 찬 조롱에는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요는 민주화를 꽃피운 386의 공로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들이 주도해 만들었다고 해도 될 지금 이 세상이 과연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우냐는 것이다.

이번 책을 쓴 저자들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제 당신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 386세대가 '혁명적 투사'에서 '사회 기득권'으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우리 사회에는 부동산투기 광풍과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고착화 같은 각종 병폐가 쏟아졌다. 386의 암묵적 방조와 가담, 미필적 고의가 이런 것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저자들은 의심한다.

책은 386의 도덕적 몰락과 이중성의 사례로 부동산 스캔들에 휩싸였던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을 실명 거론한다. 그러면서 아파트를 사고팔아 20억원대 시세차익을 남긴 장관, 딸을 취직시키기 위해 기업의 편의를 봐준 정치인, 자녀의 대학 편입학을 위해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교수 등을 언급한다. 책의 출판 시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얘기도 들어갔을 법하다. 조 후보자는 '성찰하는 진보'(2008년)에서 "겉으로는 공정을 말하면서도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태에 반성을 촉구한다"고 썼다. 또 '진보집권플랜'(2010년)에선 386들이 정치적으로는 진보 운운하지만 생활에선 우파로 사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조국 사태'로 불리는 이번 논란으로 조 후보자는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우파의 삶을 살았음이 드러났다.

이번 책의 발문(跋文)을 쓴 경제학자 우석훈('88만원세대' 저자)은 영화 '놈놈놈'을 거론하며 "지금의 386은 '좋은 놈'에서 '이상한 놈'을 거쳐 '나쁜 놈'으로 그 위상이 변하는 중"이라고 꼬집었다.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고 청년세대의 불만과 울분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헬조선의 책임이 몽땅 386에게 있지야 않겠지만 미필적고의의 혐의는 없는 것인지 자문해 볼 때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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