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⑥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지다

뉴시스

입력 2021.05.26 09:14

수정 2021.05.26 09:14

자치기구 '경학사' 설립해 동포사회 구심점 역할 독립운동 중견인재 양성 위해 '신흥강습소' 세워 이상룡 선생 "무장투쟁 통해 독립 쟁취해야" 역설 '서로군정서'는 만주지역 투장독립투쟁의 기틀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안동=뉴시스] 김진호 기자 =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망명 1세대들은 고군분투했다.

26일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따르면 죽음을 무릅쓴 고난의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표는 한인 동포사회의 결속을 다지면서 안정을 이뤄 무장항일투쟁 등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백하 김대락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은 경학사와 같은 자치기구를 설립해 동포사회의 구심점을 만들고자 했다.

또 신흥강습소와 같은 학교를 세워 역사와 교양 등의 지식을 보급하면서 군사훈련을 병행해 독립운동의 중견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다.

경학사는 서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최초로 설립한 한인 자치단체였다.



1911년 4월 무렵 석주 이상룡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 등이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에서 이주 한인 300여 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으로 이상룡 선생이 추대됐다.

당시 석주 선생이 쓴 '경학사취지서'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자정순국과 같은 소극적 방법보다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한민족의 단결을 통해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신흥강습소(마을강냉이 저장 모습)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흥강습소(마을강냉이 저장 모습)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결성한지 1년간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갖고 온 개인자금으로 운영했지만 지속적 유지가 힘들었다.

특히 척박한 땅을 개척해 지은 첫 농사마저 흉작이 드는 등 기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1913년 해체되기에 이른다.

경학사가 해체된 후 합니하 지역으로 옮겨간 김대락 선생과 이상룡 선생 등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부민단을 결성했다.

이는 유하현, 통화현, 흥경현 등지에 산재한 동포사회를 통할하는 대규모 단체로 확대됐다.

부민단 간부였던 이상룡 선생과 김동삼 선생 등에 의해 병농일치의 둔전인 백서농장과 길남장 등이 개간되기도 했다.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1911년 6월에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가 설립됐다.

'신흥'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인 '신민(新民)'의 '신(新)'자와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인 '부흥(復興)'의 '흥(興)'자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경학사' 취지서(석주유고)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경학사' 취지서(석주유고)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라고도 했다.

당시 서간도 망명사회 최고령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백하 김대락 선생은 이 곳 학생들을 훈계하는 글인 '경고신흥학교학생제군'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신흥학교 교장으로 추대되자 고령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는 편지를 두 차례 쓰기도 했다. 이 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맡았다.

이 곳에서 김성로(金成魯) 선생, 김성로(金聲魯) 선생, 이광민 선생, 이형국 선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다.

신흥강습소는 몇 차례에 걸친 이전을 통해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됐다.

만주 망명과 정착의 고난 속에서 일궈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이로부터 시작된 1910년대 만주 독립운동의 흐름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크게 변모했다.

3.1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던 3월 11일 무렵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상룡 선생과 김동삼 선생, 허혁 선생 등이 서명했다. 이후 서간도 지역에도 3.1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선고유고'(김대락 문집, 김형식 필사)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선고유고'(김대락 문집, 김형식 필사)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부민단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 지역 지도자들은 독립선언 축하식 거행 및 향후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새로운 통일기구 조직을 위해 4월 초 유하현 삼원포에 모여 무장투쟁을 위한 '군정부'를 구성했다.

동포사회의 자치기구로서 민정부 성격을 띤 '한족회'도 조직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 선생을 군정부에 파견해 임시정부에 통합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이상룡 선생은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정부를 둘 수 없다"는 취지에서 통합 요청에 응해 '군정부'를 '군정서'로 격을 낮춘 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이는 1920년대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비롯한 만주지역 무장독립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한 기틀이 됐다"고 평가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kjh9326@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실시간핫클릭 이슈

많이 본 뉴스

한 컷 뉴스

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