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fn광장] 넛 크래커 속 생존 전략

이석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25 18:38

수정 2026.02.25 18:40

신기술 열광하는 중국과 중국인
싸구려·짝퉁 넘어서 신기술 선점
‘공학국가정신’ 고속 성장 가능케
핵심 과학기술에 자원·역량 집중
中 전체가 ‘규제 해방’ 혁신실험장
韓, 산업·외교 전략 재정의 시급
이석우 국제부장
이석우 국제부장

아흐레의 춘제(설) 연휴 기간 중국인들은 휴머노이드 로봇, 영상 생성 인공지능(AI) 등의 신기술 생태계 속에 푹 빠져 지냈다. 유니트리의 H1 로봇들은 설 전날인 16일 중앙(CC)TV '춘제 완후이'(春節晩會)에 나와 360도 회전, 3m 공중제비 등 다양한 무술 연기로 시청하던 6억7700만명의 중국인을 사로잡았다.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전국 공연장과 공원 등에서 외줄을 타고, 인간 배우들과 협연하는 모습은 샤오훙슈나 더우인 등 주요 SNS에 많이 올라와 있었다. 공연이나 판촉행사, 연회 등에 쓰이는 로봇 대여수요가 몰리며 로봇 대여점들은 주체 못할 정도의 호황을 누렸다.

충칭 등 대도시에서 수백대의 드론들이 도시 밤하늘에 새해 풍요를 기원하는 글과 각종 형상들을 수놓고 있는 장면의 사진·영상들도 쏟아졌다.

짧은 명령어나 사진 몇 장 입력하면 15초 분량의 고품질 영상을 만들어내는 바이트댄스의 영상 생성 AI '시댄스(SeeDance)2.0'도 출시 한달도 되지 않아 새 영상 제작도구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대도시들은 지구촌 어디보다 신기술을 생활 속에 먼저 적용하며 활용하는 테스트베드이자 얼리어답터가 됐다. 신기술과 공학적 성취에 대한 중국인의 수용성도 뜨겁다. '중국제조 2025' 10년 프로젝트의 성공은 이런 분위기를 더 달궜다. "중국은 전기차(EV), 자율주행, 태양광 등 10개 주요 산업분야 가운데 4개에서 세계 '리더'가 됐고, 5개 분야는 '선도그룹의 일원'이 됐다"는 평가를 얻었다. '싸구려, 짝퉁 중국'은 어느새 신기술을 선점한 첨단분야의 선두주자가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최근 '2024년 기술수준평가' 보고서는 50개 국가전략기술 가운데 한국이 중국에 앞선 것은 수소차 등 6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022년 17개 우위에서 11개 분야가 따라잡혔다. 미국을 100%로 놓았을 때 한국은 82.7%이고 유럽연합(EU) 90.5%, 중국 91.3%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같은 초고속 기술굴기는 사회 전체에 가득한 공학 중시 분위기에 힘입은 바 컸다. 엘리트 젊은이들은 창업을 꿈꾸며 공대를 택한다. 실리콘밸리의 중국분석가 댄 왕은 저서 '브레이크넥'에서 "중국은 공학도 출신 지도자들이 건설해 온 나라"며 "중국 특유 '공학국가 정신'이 압도적 속도의 대규모 인프라 건설과 고속 성장을 가능케 했다"고 지적했다. 그런 '공학국가'의 생태계와 국가적 기풍 뒤에는 엔지니어 출신 국가 지도자들이 있었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1990년 이후 국가 최고지도자 모두 엔지니어 출신이다. 중국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공산당 정치국과 중앙위원회도 공대 출신들이 절대다수다. 엔지니어 지도자들은 국가 자원과 국민 역량을 핵심 과학기술 강화에 집중시키고 동원했다. 첨단기술을 패권경쟁의 게임체인저로 보는 시 주석은 첨단 산업기술을 강조하는 '신질생산력'을 주창해 왔다. 지난 9일 그는 베이징 이좡의 정보기술(IT) 혁신단지를 찾았다. 그가 바늘에 실을 꿰는 휴머노이드 로봇들을 점검하고, AI 산업 진전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당일 CCTV 등을 통해 전국에 송출됐다. 최대 명절을 앞둔 최고지도자 행보의 메시지는 기술혁신이었다.

상하이에 체류 중인 한 지인은 춘제 기간 자율주행 EV를 타고 도시 곳곳을 돌아봤다면서 독일차 업체들이 왜 중국 EV 업체들에 기술협력을 '애걸'하는지 절감했다고 전했다. 중국 경제수도의 자율주행 가능지역은 전 면적의 30%가 넘는 2144㎢나 된다. 지인은 "도시 전체가 혁신실험장, 규제에서 해방된 규제샌드박스 같다"고 전해왔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지난주 트럼프 관세 위법 판결 이후 트럼프 정부는 관세정책의 재편을 밀어붙이며 다시 지구촌을 흔들어댔다. 그 와중에도 '중국표준2035'를 내놓으며 압도적 제조역량에 이어 글로벌 기술표준의 주도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 중국. 공급망 차단과 관세·금융 정책으로 중국을 주저앉히겠다는 미국. 두 초강대국의 거칠어진 힘겨루기는 자유무역의 문을 좁히며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 생존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국토 전체, 산업 전반을 규제샌드박스처럼 만들겠다는 각오 없이는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처지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그만큼 '레드테크'의 공세와 동맹 미국의 '달라진 전략'은 비수처럼 우리를 겨눈다. 반도체 호황의 착시를 넘어 미래 대응에 꼬삐를 더 조일 때다.
요동치는 글로벌 환경, 변덕스러운 근육질 강대국들 틈에서 '넛 크래커'(호두까기)에 낀 호두처럼 되지 않기 위한 산업·외교 전략의 재정의와 새 국가적 어젠다 세팅이 시급하다.

june@fnnews.com 이석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