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이전에 트로트가 있었다"
英BBC, 트로트 부활 대서특필
임영웅·AI트로트 등에 '주목'
단순한 복고열풍 넘어 세대공감
초고령사회 진입과도 맞닿아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것"
英BBC, 트로트 부활 대서특필
임영웅·AI트로트 등에 '주목'
단순한 복고열풍 넘어 세대공감
초고령사회 진입과도 맞닿아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것"
요즘은 노래방을 찾는 일이 드물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저녁모임 뒤 2차는 자연스레 노래방이었다.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나서야 집으로 향하던 풍경은 흔한 일상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사람들은 저마다 숨겨둔 '십팔번'을 뽐냈다. 연배가 높을수록 트로트를 선곡하는 경우가 많았고, 클래식 애호가나 팝에 조예가 깊은 이들조차 노래방에선 트로트를 열창하곤 했다.
트로트는 전통가요, 성인가요, 국민가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중에는 트로트를 속되게 부르는 '뽕짝'이라는 용어도 있었다. 쿵짝쿵짝 울려퍼지는 비교적 단순한 리듬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다. 트로트(trot)는 '빠르게 걷다'라는 뜻의 영어에서 왔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유행한 사교댄스곡 '폭스트로트'의 리듬이 일본을 거쳐 한국식 트로트로 변주됐다.
널리 애창된 것에 비하면 트로트는 국내에서 푸대접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해 수입된 외래 장르라는 '원죄'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트로트는 일본 고유의 민속음악에 서양의 트로트 리듬을 가미한 엔카(演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단조풍의 5음계를 사용하는 엔카는 주로 술, 여자, 눈물, 이별 등을 소재로 남녀 간의 슬픈 사랑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20~1930년대 엔카를 번안한 '시들은 방초' 등이 유행하면서 국내에서도 창작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인수의 '황성옛터',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이 이때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트로트는 1960~19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수난을 겪기도 했다. 왜색풍의 리듬과 비탄조의 가사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한 신문은 "(트로트를) 게다짝을 신고 팔자걸음을 앙금앙금 걷는 듯한 가락"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잘 있거라 부산항' '사나이 순정' '기러기 아빠' 등이 그때 금지된 곡들이다. 이들 노래는 1980년대 후반이나 돼서야 금지곡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던 트로트가 부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19년 한 종편 채널이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을 방영한 이후 쏟아져 나온 각종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다. 저속한 가사와 상투성을 지적하며 트로트를 저평가하는 시선이 여전하지만 트로트엔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묘한 힘이 있다는 사실까지 숨기긴 어렵다. 댄스, 발라드와 함께 트로트가 여전히 국내 음악시장을 3등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최근 영국의 BBC가 '한때 촌스럽다고 조롱받던 한국의 이 음악 장르, 다시 부활하다'라는 다소 긴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BBC는 이 기사에서 "(한국에는) K팝 이전에 트로트가 있었다"면서 트로트를 "20세기 대격변을 거치며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한국의 현대음악 장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최근 불고 있는 트로트 부활의 최전선엔 올해 34세인 젊은 트로트 가수 임영웅이 있다고 보도했다. 또 아직 낙관하긴 이르지만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트로트 음악이 시장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트로트의 부활은 단순한 복고 열풍이라기보다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인구 구조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에서 중장년층은 가장 충성도 높은 시청자이자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에게 트로트나 이를 다룬 TV 프로그램은 하루의 시간을 채워주는 익숙한 배경음악이자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정서적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짧은 영상과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텔레비전 앞에서 본방을 사수하는 시청 문화가 여전한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트로트가 세대 간의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영웅 같은 젊은 가수들은 발라드와 팝의 요소를 끌어안으며 사운드를 현대화했고, 젊은 층 역시 부모세대가 즐겨 듣고 '십팔번'으로 애창하기도 하는 노래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때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리듬과 창법은 이제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로 재조명되고 있다. 어쩌면 트로트의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지속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유행이 바뀌어도,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 목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트로트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 오래 남아 우리의 시간을 함께 건너가고 있다.
jsm64@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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