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칼럼

"美中에 밀린 AI로봇, 핵심부품 기술자립 선행돼야 승리" [논설실의 뉴스 진단]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3.04 18:40

수정 2026.03.04 18:43

60주년 맞은 KIST 오상록 원장
대한민국의 발전 이끈 60년
청계천 한일은행 지하에 꾸린 첫 연구소
그땐 나라 먹고살기 위한 과제가 우선
컬러TV 수상기·4족 보행로봇 등이 결실
휴머노이드 양강사이 패권전쟁
머리 잘 만드는 美…몸체 제작 앞선 中
그들 앞서려면 양질 데이터 뒷받침돼야
제조업에 강한 우리나라 유리한 위치
앞으로 목표는 난제 해결
모두가 쓸수 있는 기술 만드는 게 과학
고령화시대 신약·초물성소재 연구 등
10~20년뒤 국가 이끌 R&D 집중할 것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이 최근 서울 성북구 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과학의 현실과 미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오 원장은 앞으로 국가가 풀지 못한 기술난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박범준 기자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이 최근 서울 성북구 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과학의 현실과 미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오 원장은 앞으로 국가가 풀지 못한 기술난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박범준 기자
여공들이 눈 비비며 만든 가발로 수출탑을 쌓던 시절이 1960년대다. 당시 전체 수출의 25%가 가발이었다. 가발 수출로 번 돈으로 길을 내고, 학교도 지었다. 서울 홍릉 인근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그 시대에 문을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만나 베트남 파병 대가로 과학연구소 지원을 요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에서 받은 1000만달러에 우리 정부가 1000만달러를 보태 세워진 KIST가 올해로 발족 60주년을 맞았다. 처음에는 앞선 제품을 따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세계를 압도하던 일본 첨단제품은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과 추월을 넘어 초격차를 이루기까지 KIST가 한 역할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제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기술패권 전쟁에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 로봇공학자인 오상록 원장을 만나 당면 과제를 들어봤다.

―가난한 시대 KIST가 미래 싱크탱크를 자처했다. 60년을 맞은 소감은.

▲1988년 연구소에 들어와 37년을 여기서 지냈다. 60년 역사 중 반 이상을 지켜본 입장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연구소가 시작된 곳이 청계천 한일은행 지하였다. 당장 돈이 되는 기술이 뭘까를 거기서 궁리했다. 국산화를 빨리 해서 기업을 도와주고 산업을 일으켜 세우자는 열의가 대단했다. 그리고 세상에 없는 걸 만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KIST 60년은 대한민국 발전을 이끈 축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KIST의 축적을 굵직하게 정리해본다면.

▲지금의 포스코가 KIST 선배들의 큰 그림에서 나왔다. 1969년 포항종합제철 계획을 세운 곳이 여기다. 포스코 기공식에서 당시 김학렬 부총리는 "지금까지 투자된 KIST 예산은 이 계획서 하나로 다 회수됐다"고 한 말이 오래 회자됐다. 국산 철강이 없었다면 자동차, 조선, 화학도 꽃을 못 피웠을 것이다. 디지털, 로봇분야에서도 일찌감치 성과를 냈다. 국내 최초 컬러TV 수상기, 최초 전산시스템인 세종 1호, 4족 보행 인간형 로봇 센토를 KIST가 해냈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도전이 가능한 바탕이 무엇이었나.

▲초창기를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대통령과 선배 세대들은 당장 무엇이 필요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이 매우 명확했다. 초창기 연구소 주역 31명의 사진이 본원 1층에 걸려 있다. 나라 발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온 분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아파트를 지어주고, 대학교수 임금의 2~3배 많은 보상을 해준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받은 처우와 비교하면 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국을 위해 해보자는 열의로 뭉쳤다. 최형섭 초대 소장의 리더십, 대통령의 국가비전이 골고루 빛을 발했다.

―이제는 후발 중국의 맹추격에 총력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다.

▲상당히 어려운 주제다. 중국의 지금은 중국식 연구개발(R&D)의 힘이다. 가령 스타트업을 만들어 R&D 비용을 쓰면 투자액 이상을 돌려주는 구조다. R&D 비용을 돌려주는 정책은 R&D만 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개발된 기술을 스타트업들이 같이 사용한다. 똑같은 목표에 해당하는 기술을 위해 모두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동종 업종이 공유하게 하는 방식이다. 중국이니까 가능하다. 기술축적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된다. 중국의 로봇, 휴머노이드 개발이 이런 식이었다.

―피지컬 AI, 휴머노이드 로봇이 화두다. 중국과 미국에 비해 우리의 수준은 어디쯤인가.

▲이 분야는 미중의 확고한 양강체제다. 미국은 AI 머리 부분에 많이 앞서 있고, 중국은 AI 몸체 기술이 확실히 우위다. 우리나라는 격차가 많이 나는 3등이다. 2강을 절대로 못 쫓아갈 위치이니 포기하는 게 낫지 않으냐는 논쟁이 지금도 있다. 미국과 중국이 압도적 양강이지만 최종 목표까지 미중 역시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았다. 마지막이 100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위치도 20 정도일 것이다. 지금 늦었다고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 지금이라도 서두르면 최종엔 먼저 가 있거나 최소한 같이 가 있을 상태가 될 수 있다. 작전을 잘 짜면 된다.

―어떤 작전인가.

▲AI 모델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몸을 만들 수 있는 데이터와 경험이 쌓여야 한다. 휴머노이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총합이다. 구동기, 센서 등 핵심 부품의 기술자립이 출발선이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휴머노이드로 진화하려면 여기에 탑재될 피지컬 AI와 성능을 좌우하는 양질의 데이터가 절대적이다. 더 많은 로봇이 현장에 투입돼 좋은 데이터를 만드는 선순환에 먼저 성공하는 나라가 기술표준과 글로벌 시장을 차지한다. 제조업이 강한 우리나라야말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KIST의 로봇 연구는 어디까지 왔나.

▲거슬러가면 우리도 일찍이 휴머노이드 연구에 뛰어들었다. 20여년 전 네트워크 휴머노이드 마루와 아라를 개발해 역량을 다졌다. 연말 공개 예정인 휴머노이드 KAPEX는 세계적 수준이라 자부한다. 당장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하드웨어 플랫폼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자본과 인력에서 열세지만 원천기술, 플랫폼, 데이터, AI로 이어지는 가치사슬을 한 줄로 꿸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 한국형 AI 휴머노이드를 플랫폼 삼아 공공 테스트베드를 촘촘히 연결하고 이를 민간이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기술인재 빈곤에 대한 걱정이 많다.

▲과학기술인재는 기술강국의 필수요소다. 과학기술만 해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연구자에게 안정적이고 자율적 연구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래야 장기 임무에 몰입할 수 있고 성과로 이어진다. 임금과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국가적 과제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다. 기술창업의 길을 많이 열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창업해서 망해도 다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도화돼야 한다. 실용과 과학기술은 같은 맥락이다. 기본적으로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인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처음 발견하는 게 과학이다. 그렇게 발견한 것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바꾸는 게 기술이다. 이것이 실용이지 않은가.

―기초과학 성과를 쌓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국 과학자들은 가을이 괴롭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그동안 뭘 했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젊은 연구자들한테 투자를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최고과학자 대우하고는 별개다. 연구자들의 열정을 깨울 R&D 시스템 체질개선도 검토해야 한다. 촘촘한 관리 평가, 그 결과에 연계된 보상구조 속에선 연구자들이 미래를 바꿀 도전적 연구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목표를 달성하는 타성에 빠지게 된다. 연구자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기획부터 성과 활용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게 하는 방식을 적극 제안하고 싶다. 돌아보면 정부 R&D 과제가 시작된 때가 1991년이다. 성과가 서서히 나올 수 있다.

―앞으로 60년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초창기엔 국가가 먹고살기 위한 문제에 집중했다. 이제는 국가가 꼭 해결해야 하는데 못 풀고 있는 난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데 역량을 쏟을 것이다. KIST는 2년 전 연구소 기업인 큐어버스와 함께 이탈리아 글로벌 제약사 안젤리나파마에 뇌질환 치료신약 기술이전 계약을 했다.
5400억원 규모의 대형 계약이었다. 고령화 사회에 도움이 될 신약 개발, 차세대 반도체·양자, 청정수소, 기후환경, 우주용 초물성소재 연구 등이 향후 KIST 주력이 될 것이다.
10년, 20년 뒤 국가 먹거리 사업 R&D를 포함한 국가난제 해결이 우리의 역할이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약력 △서울대 전자공학 △한국과학기술원(KAIST) 로봇공학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로봇시스템본부장 △한국로봇학회 회장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 석좌교수 △KIST 방역로봇사업단장 △국가기술수준평가 운영위 위원장(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혁신도전추진특별위 위원(현)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