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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AI 시대, 철학은 전략자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3.15 18:35

수정 2026.03.15 20:33

AI는 속도, 방향은 우리가 정해
철학은 갈 길 알려주는 ‘나침반’
예술가가 철학적 사고 가진다면
기술에 종속된 창작자가 아니라
공공적 가치 설계하는 주체가 돼
문화강국의 경쟁력 한층 높일 것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인공지능(AI)은 이제 단순한 도구를 넘어 판단과 추천, 창작의 영역까지 확장됐다. 생성형 AI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음악을 작곡하는 시대에 문화예술계는 근본 질문과 마주한다. 인간 예술가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예술의 가치체계는 기술 효율과 시장 논리에 의해 재편될 위험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코딩능력 확대가 아니라 기술의 전제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철학적 사유다. 기술은 수단일 뿐이며,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 판단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데이터 분석기업 팔란티어는 공학 역량과 함께 현실을 해석하는 능력을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 왔다. 최고경영자(CEO) 알렉스 카프는 독일의 철학 박사 출신으로, 인문학적 통찰이 데이터 분석과 정책자문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 회사는 인문사회 전공자를 데이터와 정책 업무에 적극 기용하며 문명사 세미나도 운영한다. 데이터가 가치와 권력을 반영한다는 인식 아래 알고리즘 설계는 곧 세계관 설계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문화예술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AI는 화풍 모방과 스타일 재현, 관객 취향 예측을 넘어 창작의 외형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왜 이 이미지를 만드는지, 어떤 미적 기준을 따르는지, 누구의 데이터를 학습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철학 훈련을 받은 예술가는 기술의 전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규범을 제안할 수 있다. 미학과 존재론, 윤리학, 정치철학은 AI 시대 예술가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 역량으로 재정의돼야 한다.

저작권 논쟁은 이미 제도 영역에서 현실화됐다. 탈러 판결(Thaler case)은 AI 단독 생성물에 대해 인간 저작자가 없다는 이유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역시 2023년 생성형 AI 저작권 가이드라인을 통해 인간의 창의적 개입이 없는 결과물은 보호 대상이 아니며 편집과 선택 등 기여 부분만 인정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단순한 법적 쟁점을 넘어 창작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문화정책에서도 가치 판단은 핵심 변수다. AI 창작물에 대한 공적 지원, 공공데이터 개방 범위, 예술가 소득보전 방식은 공정 보상과 표현의 자유, 공공성의 균형을 동시에 요구한다. 알고리즘을 어디까지 공공영역에 도입할 것인지, 무엇을 공공적 가치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철학적 토대 없이 설계되기 어렵다. 정책은 결국 세계관의 선택이다.

한국 대학에서 인문학은 오랫동안 취업률 중심 평가 속에서 축소돼 왔다. 최근 10년간 인문계 학과는 감소한 반면 공학 계열은 증가했다. 2023년 인문계 취업률은 전체 평균보다 낮지만 자연계와의 격차는 크게 줄었다. 이는 AI 시대에 융합형 인재 수요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 성과 지표만으로 인문학의 가치를 재단하는 방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정책 관점에서 철학 강화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전략이다. 기술윤리와 AI 정책을 결합한 교육 트랙을 재설계하고, 예술과 철학의 공동 연구 플랫폼을 제도화하며, 융합 연구지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초중등 단계부터 기술 이해와 가치 판단을 함께 다루는 교육을 도입한다면 미래 창작자의 사고체계는 근본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문화산업 현장에서도 철학적 기준은 실질적 경쟁력이다. 글로벌 플랫폼은 알고리즘을 통해 콘텐츠 노출과 수익을 배분한다. 무엇을 우수로 정의하고 어떤 창작을 추천할 것인지는 결국 가치의 문제다. 기준이 자극성과 체류시간, 광고수익에만 종속된다면 예술의 공공성과 실험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는 콘텐츠 공급자가 아니라 사회가 지향할 감수성과 상상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다. 철학은 그 방향을 설정하는 나침반이며, 기술을 비판적으로 설계하는 힘이다.

공공영역의 AI 활용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 선정과 예산 배분, 지역 예술 지원 과정에서 알고리즘 도입이 확대되는 만큼 데이터 편향과 다양성 지표에 대한 숙고가 선행돼야 한다. 기술은 효율을 높이지만 문화의 가치는 효율만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철학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영역을 지켜내는 방어선이자 행정 책임성을 강화하는 기준이다.

AI는 속도를 제공하지만 방향은 인간이 정한다.
예술가가 철학을 장착할 때 기술에 종속된 창작자가 아니라 기준을 설계하는 주체가 된다. 깊은 사유와 제도적 지원이 맞물릴 때 문화강국의 경쟁력은 더욱 구조화된다.
철학은 선택이 아니라 문화주권을 지키는 전략 자산이다.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