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궁색했으나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1년 전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간다. 한국군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 의미로 미국은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약속했다. 당시 회담에 관여한 주미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이때 한국에 플러스알파로 깜짝 선물을 제안하는데, 다름 아닌 공과대학 설립안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술연구소가 더 급하니 이걸 성사시켜 달라고 역제안한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과학고문 도널드 호니그 박사가 이 회담 후 바로 다음 달 한국을 왔다. 한국 대통령의 요구가 가능한 일의 성격인지 따져보기 위한 차원이었다. 호니그 박사를 상대한 이가 최 소장이다. 이 만남에서 최 소장이 밝힌 연구소의 목적과 비전은 명확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기초부터 연구하는 귀족적인 연구소는 우리와 맞지 않다. 나라의 가난을 벗겨줄 과제에 집중할 장사꾼 같은 계약 연구소가 필요하다.('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다시 말해 기술은 현장과 연결되어야 하고, 국가는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하며, 과학자는 문제 해결의 최전선에 있을 것. 한국의 첫 국책 과학기술연구소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다. 청계천 임시거처 생활을 끝내고 3년 뒤 홍릉으로 이전한 뒤 국가프로젝트급 헤드헌팅 작업이 시작된다. 호니그 박사와 바텔연구소가 원격지원에 나섰다. 세계의 한인 두뇌 리스트를 추려 연구소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지원을 독려했다. 엄선된 과학자를 대상으로 최형섭은 직접 발품을 팔아 포섭전을 펼친다. 당시 스카우트 장면은 뭉클하다. "노벨상이 목표인 분들이라면 여기 남으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함께 갑시다." 이에 응한 과학자들이 18명이다. K기술의 새벽은 그렇게 불을 밝혔다.
홍릉의 연구소는 산업화 기적의 설계도를 그린 곳이다. 제철보국 의지로 포항제철(현 포스코) 청사진을 만든 곳도 여기다. 첫 귀국 18인 중 한 명인 김재관이 포항제철 밑그림을 그렸다. 조선, 중공업, 전자, 기계 육성방안도 이곳에서 수립됐다. 연구소의 조선소 타당성 데이터를 본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이 "아파트와 조선소가 다를 게 뭐겠냐"며 해보겠다고 답한 일화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기술도약기 기업은 홍릉을 바라보았다. 밤이면 전국이 소등하던 시기 홍릉의 숲은 예외였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연구소 불빛 아래에서 새로운 공정이 이어지고, 산업계 난제가 풀린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절박함과 실험실의 시간은 비례했다.
한국 산업화 기적은 기술을 국가 프로젝트로 삼았던 영민한 관료와 의지의 과학자, 불굴의 기업가들 조합이 해낸 결과물이다. 가난한 나라가 먹고살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국가, 연구소, 기업이 함께 밀어붙여 결국 손에 쥐었다. 지금의 조선, 중공업,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신화는 60년 전 청계천의 허름한 10평 남짓 방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AI) 기술 새판이 깔리고 있다. 성공 공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가와 기술인재, 기업의 의기투합이 AI 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급박한 시기에 정부가 AI 국가미래 설계자로 영입한 민간 전문가를 지역 보궐선거 주자로 빼가겠다는 여당의 발상은 참으로 후진적이다. 발상이 현실화되면 정부의 정책 진정성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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