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추적

최가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최가영 건설부동산부 기자
최가영 건설부동산부 기자

메일함에 도착한 한 통의 제보메일.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서울 곳곳의 건물 위치와 임대인, 법인, 공인중개사, 가족관계가 선으로 연결된 관계도가 담겨 있었다. 얼핏 수사기관이 작성한 사건 분석자료 같지만, 이 자료를 만든 사람들은 경찰도 조사관도 아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청년 세입자들이었다.

지난해 서울 동작구 청년안심주택 '사당 코브' 보증금 미반환 사건 이후 비슷한 제보가 잇따랐다. 사당 코브 공동 임대인이 소유한 또 다른 건물의 세입자들, 임대인의 가족이나 특수관계인 명의 건물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사당 코브 임대인 중 A씨의 배우자, 부모, 장모 등 가족 명의 건물에서도 보증금 미반환과 경매가 반복됐다. 피해자들은 이를 근거로 A씨가 실질적 운영 주체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운영 여부는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려질 문제지만, 서로 다른 명의의 건물에서 비슷한 시기에 경매가 반복됐다는 점은 의문을 남긴다. 피해자들이 취합한 자료를 보면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규모는 16개 동, 428가구, 피해금액은 약 356억원이다.

피해자들은 공인중개사에도 주목했다. 서로 다른 자치구 건물인데도 동일한 중개인이 업체만 바꿔 반복 등장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임대인과 중개업소, 시행·시공사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워크숍 사진과 SNS 게시물, 댓글까지 추적한 자료는 웬만한 형사를 떠올리게 한다.

피해자들이 직접 증거를 모으고 관계도를 그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정부와 제도만 믿고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청년안심주택 사태가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지만 사당 코브 임차인들은 사건 발생 1년여 만에야 보증금 반환 신청이 가능해졌다.

최근 국회는 전세사기피해자지원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마련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2023년 특별법 제정 당시 약속한 '6개월 단위 보완 입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직접 수사파일을 만들고 사건 관계도를 그리는 사회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보증금을 잃은 청년들이 등기부를 떼고 관계인을 추적해야만 자신의 피해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당 코브에서 시작된 추적은 어느새 수백가구 규모의 의혹으로 번졌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들은 정부나 수사기관이 아니라 피해자들이었다.

going@fnnews.com 최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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