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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사찰 두고 대립했던 남북회담 문서 35여년만 공개

김경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1991년 12월 판문점에서 진행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통일부 제공
1991년 12월 판문점에서 진행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통일부 제공

[파이낸셜뉴스] 지난 1991~1993년 진행된 남북회담 문서 사료집이 35여년만에 공개했다. 30일 통일부가 공개한 3836쪽 분량의 비공개 남북회담 사료에는 지난 1991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진행된 남북 핵협상 과정에서 핵문제를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과 협상 논리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1991년 '핵 문제'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의 핵심 쟁점은 핵 시설에 대한 사찰이었다. 북측 대표였던 최우진 외교부(현 외무성) 순회대사는 "남쪽에 미국의 핵무기가 군산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며 미군기지도 사찰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측 공동대표였던 김영철 인민무력부 부국장은 남측의 팀스피릿 훈련 참관 제안을 거절하며 "어떤 장비와 비행기가 동원되는지 앉은 자리에서 다 손금 보듯 알 수가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또 "가서 보는 것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시야에서 볼 수 있지만, 앉아서는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며 "훈련 때마다 참가하는 항공모함 있잖나. 핵탄 50발 내지 100발 싣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 1992년 12월 17일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 마지막 본회의인 제13차 회의 내용도 공개됐다. 북한이 6·25전쟁의 책임을 남측에 돌리고 미국의 핵위협을 이유로 핵문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친 반면, 한국은 소련 측 문서와 남북 합의를 근거로 맞서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 핵통제공동위 제13차 회담에서 북한은 6·25전쟁 책임이 남측에 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며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미국과 한국에 돌렸다. 외부의 핵위협이 계속되는 만큼 자위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폈다.

이에 공 위원장은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라고 기록한 니키타 후르시초프(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회고록과 공개된 구소련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일성 주석이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준비했다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공 위원장은 "후르시초프 회고록과 구소련 외교문서에 '스티코프 전문'까지 공개돼 있는데 더 이상 북침 주장을 반복하지 말라"며 "무엇이 동족을 해친 범죄적 행위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라고 맞섰다. 스티코프 전문은 6·25전쟁 때 스탈린과 평양 주재 소련대사인 테렌치비티 스티코프가 주고받은 비밀 전문이다. 이 전문에는 소련의 군수지원 등 북한과 소련이 전쟁 준비를 사전에 공모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선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이후에 진행을 추진한 상호 사찰 방식에 대해 서로의 생각이 180도 달랐던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은 1991년 말 핵협상 과정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한국 정부는 1992년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했다. 북한은 1992년 1월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같은 해 5~6월 첫 임시사찰도 수용했다.

이어 1992년 2월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했지만, 상호 사찰 방식에서는 끝내 접점을 찾지 못했다. 한국은 조기 상호 사찰과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는 대가로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사찰을 요구했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도 사찰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이 북측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출범한 핵통제공동위에서도 양측은 사찰 대상과 방식, 특별사찰 도입 여부 등을 놓고 평행선을 달렸다.

rainman@fnnews.com 김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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