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실적 개막…투자액보다 '설비 확충'이 관건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발표했음에도 반도체주가 급락하면서 뉴욕증시는 물론 글로벌 증시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에 올라탔던 헤지펀드들의 '모멘텀 투자'가 한꺼번에 청산되며 반도체 업종이 약세장(Bear Market)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주부터 본격화되는 미국 빅테크 실적 발표에 전 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번 실적 시즌을 AI 투자 열풍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AI 랠리의 균열을 확인하는 변곡점이 될지를 가를 시험대로 보고 있다.
테슬라와 알파벳이 오는 22일(현지시간) 실적을 발표하며 미국 빅테크 실적 시즌의 막을 올린다. 이어 다음 주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플랫폼이 29일, 애플과 아마존닷컴이 30일 잇따라 성적표를 내놓는다. 이들 6개 기업의 시가총액은 S&P500지수 전체의 약 25%를 차지한다. 이번 실적은 AI 투자 지속 여부와 뉴욕증시의 방향성을 가를 최대 분수령으로 꼽힌다.
이들 빅테크의 실적 발표가 주목받는 이유는 최근 급락한 반도체주의 향방을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히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지난주 약 10% 급락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조치로 시장이 흔들렸던 지난해 4월 이후 가장 큰 주간 낙폭을 기록했다. 지수는 6월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해 통상적인 기준인 '약세장'에 진입했다.
이번 조정의 중심에는 AI 최대 수혜주였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있다. 마이크론과 샌디스크 등 메모리 반도체주가 급락하면서 그동안 시장을 이끌었던 '모멘텀 투자'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멘텀 투자는 최근 가장 많이 오른 종목이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자금을 집중하는 투자 전략으로, AI 랠리 기간 헤지펀드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골드만삭스의 크리스티안 뮐러-글리스만 자산배분 리서치 책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현재 상황을 "기록적인 수준의 모멘텀 매도"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근 3주 동안 시장에서 대규모 포지션 청산이 이어지고 있다"며 "반도체 투자 스토리에 지나치게 많은 자금이 몰렸고, 지금은 단기 투자자와 뮤추얼펀드에 가장 큰 손실을 안기는 거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블룸버그의 모멘텀 전략지수도 기술주 랠리가 정점을 찍은 지난 6월 이후 13% 하락하며 투자심리 악화를 반영하고 있다.
결국 이번 실적 시즌의 핵심은 빅테크가 AI 투자 확대 기조를 유지할지, 아니면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설지를 확인하는 데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에서는 특히 오는 22일 실적을 발표하는 알파벳에 주목하고 있다. 시가총액 약 4조2000억달러로 미국 증시 3위 기업인 알파벳은 뉴욕증시 상승세를 이끌어온 '매그니피센트7(Magnificent Seven)'의 핵심 종목인 데다 AI 데이터센터와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대표적인 '하이퍼스케일러'이기 때문이다.
알파벳의 AI 투자 계획은 올해 반도체 랠리를 이끈 핵심 동력으로 평가된다. 시장에서는 이번 실적 발표에서 AI 관련 자본지출(CapEx) 가이던스가 유지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알파벳은 올해 설비투자가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1870억달러(약 26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알파벳·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메타 등 4개사의 올해 설비투자 규모는 7250억달러(약 1000조원), 2027년에는 9000억달러(약 124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케빈 만 헨니언앤드월시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로이터통신에 "알파벳이 AI 투자 계획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든 지출 축소를 시사한다면 AI 생태계 전반으로 충격이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빅테크의 자본지출 증가 규모만으로 AI 투자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을 비롯해 전력 장비와 건설 자재, 숙련 인력, 전력망 연결 비용이 동시에 오르면서 같은 금액을 투입해도 확보할 수 있는 AI 컴퓨팅 용량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는 주요 AI 시스템의 1기가와트(GW)당 구축 비용이 최근 약 20% 상승한 것으로 추산했다. 브래드 개스트워스 서큘러테크놀로지리서치 책임자는 향후 AI 자본지출 증가분의 20~30%는 실제 설비 확장이 아니라 물가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를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자본지출 증가 자체보다 실제 전력 용량과 GPU 배치, 메모리 구매, 네트워크 투자,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이 얼마나 확대되는지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설비 확충 지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빅테크의 투자 확대는 AI 인프라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확장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HSBC의 맥스 케트너 멀티에셋 수석전략가는 FT에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 증가 기대치는 여전히 지나치게 높다"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이 이어질 경우 모멘텀 청산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