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HD현대 필리핀조선소 첫 배 띄웠다…'수빅 부활' 실적으로 증명
첫 호선 진수로 전 공정 수행 능력 입증
반복 건조·저비용 구조 앞세워 연 10척 체제 도전
상선 넘어 함정·MRO 거점 확장 가능성도
[파이낸셜뉴스] HD현대그룹이 필리핀 수빅만에서 재가동한 HD현대중공업 필리핀조선소(HHIP)가 첫 선박을 바다에 띄웠다. 장기간 멈춰 있던 옛 한진중공업 조선소를 인수하지 않고 필요한 부지만 임차해 생산 거점으로 되살린 지 약 2년 만이다. 설비 복구와 현지 인력 교육을 넘어 실제 건조 능력까지 입증하면서 HD현대의 동남아 생산벨트 전략도 시험대를 통과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HD현대는 중국과 경쟁이 심화 됨에 따라 가격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열위에 놓인 선박들은 베트남과 필리핀 등에서 건조해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고, 국내에서는 기술 우위를 갖고 있는 친환경 선박 위주의 고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28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HHIP는 이날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 첫 호선인 11만5000DWT급 석유화학제품운반선(PC선)을 진수했다. 이 선박은 아시아 선사가 발주한 4척 가운데 첫 번째 선박이다. 진수된 선박은 안벽에서 배관·전장 등 후속 의장 작업과 시운전을 거쳐 선주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이번 진수는 단순한 공정 행사를 넘어 HHIP가 강재 절단부터 블록 제작, 탑재까지 신조선 건조의 핵심 공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는 의미가 있다. HHIP는 2024년 첫 선박을 수주한 뒤 2025년 건조에 착수했다. 올해 2월에는 첫 호선 탑재를 시작했고 약 5개월 만에 진수 단계에 도달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새로 가동하는 해외 조선소는 첫 호선에서 공정 지연이나 재작업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예정된 시기에 진수했다는 것은 설비와 인력, 생산관리 체계가 일정 수준 이상 안정됐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HHIP는 미국계 사모펀드 서버러스캐피털이 확보한 옛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가운데 6도크 일대를 임차해 운영하고 있다. 서버러스는 2022년 해당 조선소를 확보했으며, HD현대는 방치된 설비를 보수하고 야드 배치와 물류 동선을 자사 생산 방식에 맞게 다시 설계했다.
한진중공업은 과거 수빅조선소에서 초대형 컨테이너선과 원유운반선, 벌크선 등 여러 선종을 동시에 건조했다. 생산 복잡도가 높아진 가운데 최대 1만8000명에 달하는 인력이 투입되면서 비용과 품질 관리 부담이 커졌다. HD현대는 반대로 선종을 11만5000DWT급 PC선에 집중했다. 같은 설계의 선박을 연속 건조하면 설계 변경과 자재 조달 부담을 줄이고 작업자의 숙련도를 빠르게 높일 수 있다. 첫 호선에서 축적한 공정 데이터가 후속 선박에 반영되는 만큼 두 번째 선박부터 건조 기간 단축과 원가 개선 효과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첫 진수보다 후속 호선의 건조 속도에 주목한다. 첫 배는 설비 검증과 인력 교육 비용을 함께 부담하지만 반복 건조 단계에 들어가면 블록 제작과 탑재 주기를 줄일 수 있어서다. HHIP가 확보한 11만5000DWT급 PC선 수주잔고는 안정적인 반복 건조 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으로 평가된다. 최근에는 동일 선형의 추가 발주도 이어지고 있다.
HHIP는 2030년까지 약 5500명의 인력으로 연간 최대 10척을 건조하는 체제가 목표다. 과거 한진중공업이 비슷한 생산량을 위해 설정했던 인력 규모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야드 물류 최적화와 공정 표준화, 병목 공정의 로봇 투입을 통해 인력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전략이다.
필리핀의 인건비가 한국보다 크게 낮다는 점도 강점이다. 다만 낮은 임금이 곧바로 수익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지 작업자의 숙련도와 기자재 공급망, 재작업률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첫 호선 진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한 사건으로 풀이된다.
연간 PC선 7척과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3척을 건조하는 체제가 갖춰지면 HHIP의 연 매출은 1조원을 넘어 최대 1조5000억원 안팎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PC선으로 생산 기반을 다진 뒤 고부가 대형 선박으로 선종을 넓히는 단계적 접근이다.
수빅조선소의 가치는 생산능력에만 머물지 않는다. 수빅만은 과거 미 해군기지가 자리했던 곳으로 남중국해와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소 일부에는 필리핀 해군 관련 시설도 들어서 있다. 미국 자본이 조선소 기반을 확보하고 한국 기업이 선박 건조를 담당하는 협력 구조라는 점에서 한·미·필리핀 조선 협력의 상징성이 크다.
HD현대중공업은 2016년 이후 필리핀 해군에서 호위함과 초계함 등 총 12척을 수주하며 현지 협력 관계를 쌓았다. 이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HHIP가 상선 건조뿐만 아니라 필리핀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나아가 미 해군 지원 거점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필리핀 정부 역시 조선업 부활에 기대를 걸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2025년 9월 HHIP 출범 행사에 참석해 수빅조선소 재가동을 자국 조선산업 회복과 일자리 창출의 계기로 평가했다.
HHIP는 베트남 조선소와 함께 HD현대의 동남아 생산망인 'SEA 벨트'의 한 축을 담당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올해 3월 조선소 현장을 직접 찾아 살펴본 이유다. 베트남에서 제작한 데크하우스와 연돌 등을 필리핀으로 공급하는 방식으로 해외 조선소 간 분업도 확대할 수 있다. 한국 조선소가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과 함정 등 고부가 선박에 집중하고, 필리핀과 베트남이 가격 경쟁력이 중요한 표준 선박을 맡는 구조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첫 진수로 HHIP가 계획 단계의 해외 거점에서 실제 선박을 생산하는 조선소로 전환됐다"며 "앞으로는 후속 호선의 공정 단축과 품질 안정화가 수빅조선소의 사업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강구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