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부 먼저 얻은 한국, 먼저 잃을 수도'…이코노미스트 진단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의 최대 수혜국으로 꼽혔던 한국이 오히려 AI 버블 붕괴의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지나치게 집중된 증시 구조에 개인투자자의 공격적인 레버리지 투자까지 겹치면서 AI 투자 기대가 순식간에 금융시장 불안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9일(현지시간) '한국 증시의 화려했던 상승장이 극적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을 "국가자본주의와 시장 투기가 극단적으로 결합한 거대한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AI가 약속한 부를 가장 먼저 맛본 나라가 그 부를 가장 먼저 빼앗길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AI 투자 붐이 사실상 미국 빅테크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으로 이어진 막대한 자금 이동이었다고 분석했다.
알파벳과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이 데이터센터 건설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는 동안, AI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전 세계 투자자들의 자금이 집중됐다.
매체는 이를 "기업 역사상 가장 큰 국경 간 현금 이전 가운데 하나"라며 "실리콘밸리가 미래에 거는 거대한 베팅이 한국에서 실제 부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시장의 시선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와 코스닥은 최근 고점 대비 각각 40.4%, 47.6% 하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각각 44.7%, 55.7% 급락했다. 특히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삼성전자가 74.7%, SK하이닉스는 84.2% 폭락하며 낙폭을 더욱 키웠다.
가장 역설적인 부분은 실적과 주가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배 이상 늘었지만 발표 이후 일주일 만에 주가가 20% 넘게 급락했다. 삼성전자 역시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지만 투자자들은 오히려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 이유를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서 찾았다.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확산으로 메모리 수요는 앞으로도 늘겠지만, 결국 업체들의 공격적인 증설이 공급 과잉을 초래해 가격과 수익성을 다시 끌어내릴 가능성을 시장이 선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1년 동안 평균 한 자릿수 수준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에 거래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주가가 크게 올랐는데도 PER이 낮다는 것은 투자자들이 현재 이익이 이미 정점에 도달했거나 정점에 매우 가까워졌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개인투자자의 공격적인 투자도 시장 변동성을 증폭시킨 요인으로 지목됐다.
AI 열풍이 절정에 달하면서 은행과 보험사에 있던 가계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이동했고, 올해 개별 종목의 수익률을 배수로 추종하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까지 등장했다.
상승장에서는 수익률을 극대화했지만 주가가 하락하자 반대매매와 손실이 동시에 확대되며 낙폭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시장을 부양하던 정부가 이제는 투자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며 정치권이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점도 소개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의 가장 큰 위험으로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추격을 꼽았다.
중국 업체들이 범용 메모리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가격 경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I 모델 시장에서도 미국 기업들이 중국 오픈소스 모델과 경쟁하는 것처럼 메모리 시장 역시 비슷한 경쟁 구도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강조해온 장기 공급계약 역시 절대적인 안전판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경기가 둔화되거나 AI 투자 열기가 식을 경우 고객사가 계약 물량을 줄이거나 가격 조건을 다시 협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